Premier League: Newcastle clinch survival after beating QPR 2-1

 

 

May 12, 2013

 

 

로프터스 로드에서의 QPR 원정경기에서 승리한 뉴캐슬은 내년에도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이번 경기는 뉴캐슬이 이번 시즌 기록한 2번째 원정 승리이다. 이미 강등된 QPR은 로익 레미의 페널티로

 

이길 것처럼 보였지만 하템 벤 아르파의 페널티로 동점을 허용했고 수비혼란 속에 요안 구프랑의

 

결승골이 들어갔다. 하지만 뉴캐슬의 롭 엘리엇 골키퍼가 퇴장 당하는 바람에 경기가 끝날 때까지

 

뉴캐슬 선수들은 필사적으로 뛰어야 했다.

 

이 경기의 승리로 인하여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잔류를 확정지었다.

 

 


 

출처: Sky Sports

 

http://www1.skysports.com/football/live/match/261927/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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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er Newcastle United Player Nolberto Solano On The Lookout For A Return To Management

By Phil Forster

 

 

페루 프리메라 디비전의 우니베르시타리오 데포르테스에서 짧은 기간의 감독 경험을 한 놀베르토 솔라노는 이제 잉글랜드 리그에서의 감독직 기회를 노리고 있다. 前 뉴캐슬 유나이티드 선수인 솔라노는 지난 12월 리마 연고의 우니베르시타리오에서 해임된 후 잉글랜드 북동부에 돌아왔다.

 

"우니베르시타리오에서의 생활은 즐거웠고 제가 이루어낸 결과가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처음 우니베르시타리오의 감독으로 임명됐을때 우니베르시타리오는 강등권 싸움을 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었죠. 하지만 클럽은 저의 방침에 즉각 응답해 주었고 결국 강등권에서 탈출하여 리그 상위권까지 팀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솔라노에게 우니베르시타리오에서 떠나게 된 것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구단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저와 구단주의 생각이 서로 달랐습니다. 뭐 축구란 그런거죠."

 

현재 솔라노는 잉글랜드의 감독직을 노리고 있지만 페루로 돌아가 감독교육을 계속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으며 언젠가 과거 소속팀인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돌아가 감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잉글랜드에서 감독을 하는 것은 제 꿈이지만 뉴캐슬의 감독이 된다는 것은 꿈 그 이상의 것이죠."

 

또한 솔라노는 앨런 파듀 감독이 현재 뉴캐슬에서 보이고 있는 행보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뉴캐슬이 승격하자마자 5위를 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겁니다."

 


 

출처: Sky Tyne and Wear

http://tyneandwear.sky.com/newcastleunited/video/60404/nobby-solano-eyes-his-next-club-to-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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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떠오르는 뉴캐슬의 앤디 캐롤의 재영입설을 마치 KBO의 이택근의 경우와 같다고 비유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글을 써봅니다. 뉴캐슬의 팬이자 넥센 히어로즈의 팬인 저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거든요. 이택근과 캐롤을 비교해 보면서 이번 영입설에 대한 제 생각도 써보고 싶었구요. 먼저 야구에 관심없는 분들에게 간단히 이택근 이야기를 설명해 드리는게 낫겠네요. 


한국프로야구 2010년 시즌, 히어로즈의 이택근은 25억의 현금트레이드로 LG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2012년 시즌을 앞두고 히어로즈는 FA를 선언한 이택근을 재영입하게 되죠. FA를 선언한 이택근이었기 때문에 LG는 이택근의 이적에 대한 아무런 이적료도 받지 못했구요. (유망주 1명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결국 히어로즈가 이택근을 2년 동안 LG에게 25억 받고 내줬다가 공짜로 다시 데려온 셈이죠. 


이러한 이유로 앤디 캐롤의 영입을 가르켜 이택근이 생각난다고 하신 것 같네요. 35m으로 앤디 캐롤을 판 후 15m으로 영입하니 20m 이익이니까요. 하지만 이택근의 경우와는 완전 다른 케이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두가지 이유인데요. 첫째, 현재 팀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이라는 점이구요. 둘째, 팀 케미스트리에 지장을 주는 선수라는 점입니다. 


1. 현재 팀 전력에 도임이 되지 않는 선수 파피스 시세, 뎀바 바라는 리그 탑 레벨의 투톱을 보유한 뉴캐슬에게 과연 앤디 캐롤이라는 또 다른 공격수가 필요한가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물론 유망한 선수이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말씀하는 분들도 있겠죠. 맞는 말입니다. 앤디 캐롤의 피지컬과 기록을 보면 미래에 유망할 수도 있는 선수입니다. 하지만 리버풀을 떠나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 결국 경기를 못 나오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년 좋은 모습으로 검증된 시세, 바를 제치고 앤디 캐롤을 1번째 옵션으로 쓸 감독이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캐롤이 우리 팀으로 돌아온다면 공격진의 3번째 옵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전을 뛰면서 경기에 나오고 싶은 캐롤의 생각과 3번째 옵션이라는 현실, 그리고 고작 3번째 옵션이 7만 5천 파운드라는 팀의 탑레벨 주급 선수라는 점. 결국 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히어로즈는 클린업을 맡아 줄 수 있으면서 구멍난 외야진을 채워줄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고 이택근은 딱 들어맞는 퍼즐 조각이었죠. 


2. 팀 케미스트리에 지장을 주는 선수 앤디 캐롤이 나갈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구단은 9번 제시, 재계약 등을 통하여 충분한 대우를 해주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적시장 마지막 날 리버풀의 영입제의가 들어오자 재계약한지 4개월만에 자기 주급을 올려달라며 재계약 요구를 하고 구단이 거부하자 이적시켜달라고 드러누웠죠. 그것 뿐이 아니라 구단에 있던 시절부터 폭행무제로 법정 출두하기도 하였고 팀동료 스티븐 테일러의 턱을 가격하기도 했었네요. 어떻게 봐도 팀 케미스트리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지장을 줄 선수입니다. 반면 이택근은 2010년 LG 이적시에도 선수는 떠날 생각이 없었으나 구단의 자금사정 상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냈었고 떠나기 전에도 차기 주장후보로 뽑힐 정도로 구단 내 지지가 높았으며 2012년 돌아온 후 얼마전 주장임명이 될 정도로 팀 케미스트리에 플러스 효과를 보여줬습니다. 


굳이 이택근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는 글이었지만 화두가 제 흥미를 끌어서 말이 길어졌네요. 앤디 캐롤, 분명 매력이 있는 선수지만 탑레벨 공격수 2명이 있는 우리 팀엔 필요없는 선수입니다. 캐롤은 주전을 원하지만 우린 줄 수가 없고 줄 필요도 없거든요. 우리에게 필요한 공격수는 3번째 옵션에도 만족할 유망주이지 1번째 옵션을 원하는 캐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베르바토프와 같이 검증된 선수면 모를까 캐롤은 작년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최적의 팀 케미스트리를 보여줬던 저번 시즌의 스쿼드 분위기를 해칠 수 있는 선수를 굳이 데려올 필요 있을까요? 우리가 바튼을 내친 이유도 팀 분위기를 망치기 때문이었잖아요. 이러한 이유로 앤디 캐롤의 이적 반대에 한표를 던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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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첼시, 뉴캐슬 선수인 셀레스틴 바바야로 (32세) 는 파산신고 후 채권자에게 쫓기고 있다. 한때 바바야로는 주급 £25,000을 받았던 적도 있었던 前 나이지리아 국가대표 출신이다. 그러나 바바야로의 이웃들은 바바야로의 £475,000 시가의 자택 관리 상태를 볼 때 재정상태가 안 좋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바바야로와 같은 거리에서 사는 이웃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바야로 家의 재정상태가 나쁘다는건 명확해요. 이전에는 집 관리를 깔끔하게 해왔었는데 이제 난장판이거든요. 유리온실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잔디는 너무 길게 자랐어요. 그집 사람들이 저희집에 와서 잔디깎이 좀 빌려달라고 했지만 거절했어요. 잔디가 너무 길어서 제 잔디깎이가 고장날 것 같았거든요.”

바바야로의 파산신고는 작년 런던의 법정에 신청되었고 지난 달에 확정되었다. 최근 바바야로는 해외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바야로의 파산은 바바야로가 요근래 겪어온 실망과 좌절의 극이라고 할 수 있다. 부상으로 점쳐졌던 뉴캐슬에서의 생활을 뒤로 한 채 LA갤럭시를 향했던 바바야로지만 곧 방출되었고 이 후 포츠머스로 입단하려던 시도는 말라리아로 인해 좌절되었다. 뉴캐슬에서 2007년 방출되며 남은 계약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빚을 차곡차곡 쌓아온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바바야로와 인터뷰를 시도해보았다.

최근 나이지리아와 잉글랜드의 언론에서 당신이 파산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어떻습니까?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권리가 있지요. 하고 싶은 말이있으면 맘대로 하라죠.

많은 사람들이 만약 당신이 실제로 파산한 것이 아니라면 당당히 나와서 파산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나와서 말할 이유가 없어요. 누구나 특정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지요. 그러니 내가 파산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을 지지하며 바바야로가 파산한 사람처럼 보이냐고 말했습니다.
제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삶을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 저에 대해 뭐라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러라죠.

안데헤르트, 첼시, 뉴캐슬에서 뛰면서 당신이 먹고 살만한 돈은 충분히 벌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께 감사하고 매우 편안히 살고 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축구도 은퇴했고 코치도 아닌데 요즘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젊은 선수들이 성장하는 것을 도우며 어떻게 훌륭한 프로가 될 수 있는지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너무 일찍 은퇴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는데요?
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하락세는 부상보다는 자기관리 부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부상으로 인해 조기은퇴한 젊은 선수들은 수두룩합니다. 26세의 나이로 은퇴한 선수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사람의 몸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제 몸과 당신의 몸은 다르고 마찬가지로 당신의 몸과 제 몸은 또 다르겠죠. 그렇게만 말해두겠습니다.

축구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후회가 없습니다.

가장 뛰어났던 순간은요?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이겠죠. 제 인생에서 가장 뛰어났던 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침착하게 기다리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계획이 있긴 하지만 어느 일이 일어 날지 모르니까요.



출처:
EMNNEWS
http://www.emnnews.com/2011/02/19/ex-chelsea-player-celestine-babayaro-declares-bankruptcy/
Nigeria Films
http://nigeriafilms.com/news/12631/33/i-am-not-broke-celestine-babayaro.html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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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채널e 뉴캐슬

Football 2011. 11. 5. 20:07


평소 ebs의 지식채널을 즐겨보고 이번에 그 포맷을 이용해서 PPT 발표를 하나 준비하고 있어요.

만들어 놓은 포맷 가지고 놀다가 이런걸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뉴캐슬 내용으로 PPT를 하나 만들고 그걸 동영상으로 캡쳐한 후 음악 삽입.

지식채널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해서 ebs에 죄송한 말씀을 드리며 그 외의 저작권은.. 저한테 있나요? 아하하;

재미 삼아 봐주시면 감사할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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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시비에르스키(Antoine Sibierski)는 뉴캐슬에서 1년 밖에 뛰지 않았지만 그 임팩트는 누구보다도 강렬했던 선수입니다. 뉴캐슬에서 14번의 교체 출전을 포함한 39번의 경기에 출전하여 총 8골을 기록한 시비에르스키는 당시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장기 부상으로 드러 누운 마이클 오웬의 부상을 훌륭히 메꾸었으며 특히 UEFA컵에서 4골을 퍼부으며 UEFA컵에서 뉴캐슬의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스탯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비에르스키는 많은 골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할 때마다 골을 터뜨려주는 해결사 기질을 보였으며 또한 당시 9번인 마르틴스와 좋은 호흡을 보여 마르틴스의 공격력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매 경기에 온 힘을 다해 뛰는 그의 모습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시비에르스키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뉴캐슬에 오기 전까지 시비에르스키의 축구 커리어에 잠시 얘기해보자면 릴에서 태어난 시비에르스키는 고향 팀인 릴에서 데뷔하여 그 후 옥셰르, 낭트, 랑스 등의 팀을 거칩니다. 랑스에서는 주장도 지내며 프랑스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던 시비에르스키를 맨체스터 시티에서 2003년도에 £700k의 금액을 지급하고 영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에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주로 교체출장을 하는 벤치멤버가 되었고 £2m의 이적금액에 뉴캐슬로 이적하게 됩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 영입에 뉴캐슬 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에는 시비에르스키의 이적금액의 액수가 비공개였는데 만약 £2m이었다는 것이 알려졌었다면 팬들의 반응은 더더욱 냉담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시어러가 막 은퇴한 후이었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네임 벨류가 높은 선수를 영입하길 원한 팬들에게 시비에르스키는 매우 실망스러웠던 결과였습니다. 바로 전 시즌에 마이클 오웬, 스캇 파커, 벨로졸루 엠레 등과 같은 네임 밸류가 높은 선수들을 영입했던 것에 비교하면 시비에르스키의 영입은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저도 그 당시 밤을 새며 이적시장이 닫기 전에 과연 누구를 데려올지 스카이 스포츠에서 F5를 연타하던 것이 기억나네요. 이적시장 마감을 코 앞에 앞두고 'It is believed that Newcastle just signed..'라고 뜨길래 당시 링크되었던 선수 중 훈텔라르를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에 보았더니 Antoine Sibierski. 입에서 저절로 '또  패닉 바이냐! 시비에르스키가 대체 누군데?!'라는 말이 튀어 나왔던게 기억나네요.


시비에르스키도 그걸 알았는지 이적해온 후 인터뷰를 통해 '뉴캐슬 팬 여러분이 저보다는 더 뛰어난 스타 선수를  원했던 것을 알고 있지만 로더 감독과 뉴캐슬 유나이티드에게 제 영입이 실수가 아니라는걸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제 능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시즌 초반 몇 경기 동안에는 아메오비-마르틴스의 조합에 밀려 벤치에 앉아 있던 시비에르스키였지만 또다시 찾아온 아메오비의 둔부 부상으로 인해 마르틴스와 호흡을 맞추며 주전 출전을 시작했죠. 마르틴스가 활동적으로 움직이며 공간을 확보하여 상대 수비를 흐트려 놓고 시비에르스키는 그 뒤에서 연결해주는 패스와 허를 찌르는 침투플레이, 그리고 키를 이용한 공중볼 경합을 통해 공격하며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뉴캐슬에서 은퇴하려고 준비했던 시비에르스키는 결국 팀을 떠나게 됩니다. 시비에르스키의 말에 의하면 시즌 도중 주급동결+2년연장계약을 약속 받았었으나 로더 감독의 경질 후 셰퍼드 구단주가 제의한 계약은 완전 달랐다고 합니다. 1년 계약+현 주급의 40%인 주급인 조건에 나머지 60% 주급은 경기를 출장할 경우에 지급받기로 하는 조건이었다네요. 자신이 부상당했거나 아니면 부진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제의를 받자 셰퍼드 구단주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실망한 시비에르스키는 팀을 떠나게 됩니다.


시비에르스키는 지금도 스스로를 뉴캐슬 팬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위건 소속으로 출장했던 선더랜드 전에서는 골을 기록한 후 한 인터뷰에서 '선더랜드 전에서 골을 넣은게 너무 기쁩니다. 나는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뉴캐슬 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반응을 본 뉴캐슬 팬들은 한 시즌을 뛰었을 뿐인데도 진정한 레전드라며 열렬한 환호를 보냈죠. 뉴캐슬을 떠난 후 시비에르스키는 위건과 노리치에서 뛴 후 2009년에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시비에르스키는 축구계에 남아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앙투안 시비에르스키 (Antoine Sibierski)

출생 : 1974. 08. 05. 릴 (프랑스)

포지션 :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클럽 경력 :
1992–1996 릴 97 (17)
1996–1998 옥셰르 42 (8)
1998–2000 낭트 50 (17)
2000–2003 랑스 89 (23)
2003–2006 맨체스터 시티 92 (11)
2006–2007 뉴캐슬 유나이티드 26 (3)
2007–2009 위건 33 (4)
2008 임대 노리치 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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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1927 시즌. 바로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마지막으로 1부리그 우승을 하였던 시즌입니다. 이는 영국 프로축구가 프리미어리그로 재편되기 훨씬 전 이야기이며 당시의 1부리그는 뜻 그대로 English 1st Division이라고 불렸습니다. 최근 주춤하고 있지만 팀 역사를 보면 1934~48, 1961~65, 1978~84, 1989~93 등의 2부리그 강등을 겪고도 다시 줄곧 올라왔던 뉴캐슬 유나이티드입니다. 우울하실 툰아미 여러분들을 위해 구단이 잠시 재도약의 시기를 갖는다고 생각하며 잠시나마 옛날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1926/1927년의 우승을 이끈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스쿼드를 소개합니다.

  1926/1927 시즌의 우승을 이끌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스쿼드는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시즌 동안 총 21명의 선수가 1군 출장을 했으나 주로 베스트 11 위주로 팀이 운영되었습니다. 베스트 11 중 7명이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고 평균 연령이 29세로 노련했으며 다소 단신이 많았던 스쿼드였습니다. 2군 리저브팀에는 팀에 공백이 생길 당시 별 부작용 없이 메꿔줄 수 있는 노장 선수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당시 오프사이드 규정이 바뀌어 영국 축구구단들은 포메이션의 변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습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이 변화를 첫 번째로 받아들이며 여태 꾸준히 사용해왔던 2-3-5 포메이션을 버리고 3-2-5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윌리엄 윌슨 (William Wilson. 26세. 에딘버그 출신. 45경기 0골)


  이전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합류한 스코틀랜드 출신 골키퍼는 데뷔경기에서 7골을 헌납했지만 우승시즌 모든 경기에 출장했습니다. 뉴캐슬의 압도적인 경기 내용 때문에 주로 한가했지만 좋은 골키퍼였으며 볼 핸들링과 위치 선정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근거리 슈팅을 막아내는데 뛰어났으며 크로스를 처리하는 데에 전 시즌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알프 메이트랜드 (Alf Maitland. 30세. 에딘버그 출신. 39경기 0골)

  1924년에 뉴캐슬에 들어온 메이트랜드는 그 이후 왼쪽수비자리에서 허즈페스의 백업으로 뛰었습니다. 백업으로써 16번 밖에 출장하지 못하며 별 자리를 못 잡았던 메이트랜드는 1926/1927 시즌 오른쪽 수비로 전향한 후 챈들러의 주전자리를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초반에는 오른쪽 수비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패스가 불안했지만 지능적인 태클을 보여주었고 실수를 곧장 만회하였습니다. 메이트랜드는 가끔 공을 가지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여 관중들로부터 야유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단점도 있었지만 메이트랜드는 빠른 수비결정을 내리는 체격이 좋은 수비수였으며 위험한 순간에 상대 선수를 막아내는 훌륭한 모습을 보이는 수비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메이트랜드는 좀 더 안정적이었던 허즈페스와 함께 효과적이면서도 대조적인 수비진을 이루었습니다.


프랭크 허즈페스 (Frank Hudspeth. 36세. 퍼시레인 출신. 45경기 3골)

  뉴캐슬의 진정한 전설 중 하나인 허즈페스는 19시즌 동안 뉴캐슬에서 뛰었습니다. 이 기록은 골키퍼를 제외한 필드 플레이어로서는 최장기간입니다. 우승 시즌 전까지 주장이었으며 우승시즌에서도 갤러처가 출장을 못 할시 주장역할을 맡곤 했습니다.
  당시 36세의 나이 때문에 과연 허즈페스가 아직도 1부리그에서 뛸만한 체력을 갖고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Old Surefoot’은 한경기도 빠지지 않고 출장하였으며 뉴캐슬 유나이티드 최고의 수비수였습니다.
  허즈페스는 간간히 페널티킥을 차곤 했으며 그가 기록한 3골 중 2개는 페널티킥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로디 맥켄지 (Roddie McKenzie. 25세. 인버네스 출신. 41경기 2골)

  1922년에 팀에 합류한 맥켄지는 12시즌동안 250경기 이상을 출장하며 활약했습니다. 끈기있고 열심히 뛰는 오른쪽 하프였으며 빠르고 예리한 태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볼컨트롤의 마법사’였지만 간간히 과도한 발재간을 보이다 위기를 불러와 관중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우승시즌에서 맥켄지가 보여준 훌륭한 모습은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시선을 끌게 됩니다.


찰리 스펜서 (Charlie Spencer. 26세. 워싱턴 출신. 38경기 0골)

  1921년 아마츄어리그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합류한 스펜서는 하프백으로 입단했었으나 오프사이드 규정의 변화로 인해 중앙하프로 전환하였습니다. 뉴캐슬은 오프사이드 규정에 맞춰 ‘3번째 백 포메이션’을 사용한 첫 팀입니다.
  스펜서는 기복없이 꾸준했으며 상대팀의 역습을 가로채고 끊는데 능한 선수였습니다. 우승 시즌 전에는 공격능력 부족으로 비판받았지만 포지션 경쟁자였던 무니를 물리치고 주전자리를 꿰찬 우승시즌에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윌리엄 깁슨 (William Gibson. 28세. 라크홀 출신. 35경기 출장 0골)

  1923년 아이르 유나이티드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깁슨은 곧바로 오른쪽 하프로써 팀에 자리를 잡아 내내 주전출장을 하였습니다. 172cm의 단신이었던 깁슨은 날카로운 태클과 가로채기를 보여주었으며 패스의 모범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클래스가 있는 선수였습니다. 우승시즌 초반부 깁슨은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깁슨, 맥도날드, 세이무어의 삼각편대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전술의 핵심이었습니다.


톰 어윈 (Tom Urwin. 30세. 하스웰 출신. 42경기 5골)

  선더랜드 출신의 키 작은 이 선수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선더랜드, 미들스보로에서 전부 뛴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입니다. 1924년 미들스보로부터 뉴캐슬에 합류했던 어윈은 6년 뒤 선더랜드로 이적합니다.
  민첩하고 영리했던 어윈은 양쪽 사이드를 소화해낼 수 있었으나 주로 오른쪽에서 뛰었으며 기복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슈팅을 꺼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밥 맥케이 (Bob McKay. 26세. 글래스고 출신. 28경기 11골)

  1926년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스코틀랜드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평가받았던 로버트 맥케이를 글래스고 레인저스에서 영입하는데 £2,750의 이적금을 사용했습니다. 맥케이가 1926년 10월말 합류했을 당시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8위에 불과했지만 맥케이는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필요했던 공격진에서의 ‘빠진 고리’의 자리를 채워내며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데뷔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맥케이는 정기적으로 골을 기록했지만 맥케이의 진가는 다른데에 있었습니다. 맥케이는 섬세한 발재간으로 수비수를 쉽게 제쳤으며 동료 공격수에게 절묘한 패스를 하며 공격기회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휴이 처처 (Hughie Gallacher. 23세. 벨쉴 출신. 41경기 39골)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노련한 허즈페스 대신 이 어리고 키작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수에게 주장자리를 주자 큰 반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갤러처는 우승시즌 첫 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으며 시즌 매경기당 한 골을 기록하였습니다. 시즌 내내 5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갤러처가 몇 경기를 국가대표 경기에 출장하느라 놓치지 않았다면 더 많은 골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갤러처는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우승 시즌 동안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갤러처는 약간의 틈만 있어도 어느 각도에서나 정확하고 강렬한 슈팅을 날리는 선수였습니다.
단순한 골잡이가 아니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발재간과 기발한 움직임으로 수비수들 사이를 드리블해 나갔으며 주위 선수들의 위치를 잘 인지해 훌륭한 패스를 선보였습니다.
  167cm의 단신이었던 갤러처를 막기 위해 상대 수비수들은 파울을 종종 사용했으며 갤러처는 그에 대한 ‘보복’을 보여주어 심판들에게 경고를 받곤 했습니다.


톰 맥도날드 (Tom McDonald. 31세. 인버네스 출신. 44경기 23골)

  공격수에 걸맞는 골기록과 함께 맥도날드는 예리한 스루패스와 좌우 벌려주는 패스를 보여주었습니다. 172cm의 키에도 불구하고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공격진 중 키가 큰 편이었으며 맥도날드, 세이무어, 깁슨의 왼쪽 라인 연계는 꾸준히 갤러처에게 볼을 지급했으며 세이무어와 맥도날드도 그 활약에 걸맞는 골을 기록했습니다.


스탠 세이무어 (Stan Seymour. 33세. 켈로 출신. 41경기 39골)

  훗날 감독과 다이렉터를 역임하며 ‘Mr.뉴캐슬’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세이무어는 이 당시 은퇴를 앞둔 선수였습니다. 시즌 내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즌의 총 슈팅 중 50%에 살짝 미달하는 슈팅을 기록한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짐 파크 (Jim Park. 23세. 벨쉴 출신. 5경기 0골)

  파크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으나 스펜서의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해 출장할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톰 커리 (Tom Curry. 32세. 사우스 쉴즈 출신. 5경기 0골)

  윙하프였던 커리는 1912년부터 뉴캐슬에서 뛰었으나 1926/1927년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하프백들이 보여준 뛰어난 모습 때문에 많은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커리는 가끔 출장할 때마다 어느 주전 하프백에 비교해도 못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임스 보이드 (James Boyd. 19세. 글래스고 출신. 2경기 0골)

  오른쪽 라인을 담당한 보이드는 카디프와의 홈경기에서 데비경기를 치뤘으며 레체스터와의 경기에도 출장했습니다. 우승시즌의 보이드는 아직 10대였던 미완의 선수였으며 훗날 뉴캐슬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임스 로우 (James Low. 32세. 킬버니 출신. 2경기 1골)

  어윈에게 오른쪽 주전자리에서 밀려난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우는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우승시즌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마지막 골을 기록했습니다.


에드워드 무니 (Edward Mooney. 29세. 워커 출신. 3경기 0골)

  하프백이었던 무니는 전쟁 직후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으나 1925년 12월 후 계속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시즌 첫 3경기에 출장했으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스펜서에게 밀려나게 됩니다. 우승시즌이 끝난 후 헐시티로 이적했습니다.


알버트 챈들러 (Albert Chandler. 29세. 칼리슬 출신. 4경기 0골)

  오른쪽 백이었던 챈들러는 더비로부터 1925년에 합류한 선수입니다. 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챈들러는 주전 경쟁에서 메이트랜드에게 밀리었으며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팔렸습니다.


존 클락 (John Clark. 23세. 뉴번 출신. 17경기 4골)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단신 공격진 사이에서183cm이었던 클락은 거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로 백업 공격수로 운용된 클락은 열심히 뛰었으나 느렸고 볼 터치가 좋지 않아 뉴캐슬의 빠른 공격 흐름에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늘 열심히 뛴 클락은 최선을 다했으며 팀이 필요로 할 때 1군으로 올라와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선수였습니다.


빌리 햄슨 (Billy Hampson. 42세. 레드클리프 출신. 2경기 0골)

  '노장’ 햄슨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의 13번째 시즌이자 마지막이 되는 시즌을 보냈으며 4월동안 메이트랜드의 빈자리를 메웠습니다.


조 해리스 (Joe Harris. 30세. 글래스고 출신. 9경기 0골)

  스코틀랜드 국가대표였던 윙하프 해리스는 1군으로 불려올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였습니다.


제임스 로린 (James Loughlin. 21세. 달링턴 출신. 4경기 0골)

  과감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공격수였던 로린은 좋지 않은 볼 컨트롤과 과도한 체중으로 인해 시즌이 끝나고 웨스트햄으로 팔렸습니다.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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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 시즌, 뉴캐슬의 임시감독을 수행하고 있는 조 키니어(Joe Kinnear)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는 취지 하,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1946년 12월 27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난 키니어는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토튼햄에서 보냈습니다. 1965년, 토튼햄에서 데뷔한 키니어는 1975년까지 토튼햄에서 풀백으로 활약하였으며 그가 뛰는 사이에 토튼햄은 FA컵 우승 1번, 리그컵 우승 2번, UEFA컵 우승 1번 등을 기록합니다. 아일랜드 국가대표로도 26번 출장하였던 키니어는 토튼햄에서 총 196번 출장한 후 브라이튼&호브 알비온으로 이적합니다. 하지만 브라이튼에서는 16번 밖에 출장하지 못한 후 1977년에 무릎부상으로 인하여 30세의 이른 나이로 은퇴합니다. 은퇴 후 키니어는 감독경력을 아시아에서 시작했습니다. 5년동안 UAE의 두바이에서 지내며 알샤르자에서 감독생활을 보내고 알샤바브에서 스코틀랜드 레전드 출신인 데이브 맥케이 감독 아래에서 수석코치로 일했습니다. 인도 국가대표 감독을 3개월 지낸 후 1년 동안 네팔 국가대표 감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키니어의 생활에 대해서 정보가 좀 불확실해서 정확한 기간을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아무래도 중동 쪽의 정보가 불투명하기도 하거니와 키니어가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기록이 불확실한 듯 합니다. 중요한건 알샤바브에서 수석코치 시절 모시던 감독인 데이브 맥케이가 던캐스터의 감독이 되자 키니어도 던캐스터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아시아를 떠났다는 겁니다. 역시 인맥이라는게 중요하네요.


1989년 맥케이가 버밍엄으로 떠나자 키니어는 던캐스터의 임시감독을 맡았지만 곧 구단이 인수되며 새로운 감독이 임명되면서 해임되었습니다. 1991년, 윔블던에서 리저브 코치로 고용된 키니어는 1992년에 팀의 감독인 피터 위드가 해임되자 윔블던의 임시감독으로 임명됩니다. 키니어가 임명될 당시 윔블던은 12경기를 남긴채 리그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나 키니어는 팀을 13위까지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고 윔블던은 키니어에게 정식감독 자리와 5년 계약을 선물합니다. 윔블던은 홈구장이 없었고 소액의 이적자금 밖에 없어 강등권 팀으로 여겨졌지만 키니어는 놀라운 기록들을 보여줍니다. 1992/93 시즌, 12위로 강등권에서 훌쩍 벗어나 1993/94에는 시즌 6위의 돌풍을 보여줬고, 1994/95 시즌 9위를 기록하며 前 시즌이 플루크 시즌이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1995/96 시즌에는 14위로 주춤했으나  FA컵 준준결승에 진출했고 1996/97에는 무려 FA컵과 리그컵 둘다 준결승에 진출합니다. 리그도 8위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냅니다. 당시 키니어가 이끌던 윔블던은 '크래이지 갱'이라는 별명 하에 돌풍을 일으키는 팀이었고 홈구장이 없는 빈약한 구단상황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1997/98시즌 15위, 1998/99 16위 등으로 주춤하더니 1999년 4월 3일 키니어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간 후 건강문제로 사임하자 그 바로 다음 시즌인 1999/00, 윔블던은 강등되었습니다.


레체스터, 셰필드 웬즈데이의 차기 감독 후보로 오르기도 했던 키니어는 2000/01 시즌 중, 옥스포드 유나이티드의 단장으로 임명됩니다. (단장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현재 뉴캐슬에서 데니스 와이즈가 맡고 있는 풋볼디렉터였지만 풋볼 디렉터나 단장이나 비슷한 역할이기에 단장이라고 쓰겠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된 2001년 1월, 건강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합니다. 그러나 사임한지 불과 몇 주 뒤 루튼 타운의 단장으로 임명된 것을 보면 단지 이적을 위한 변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루튼의 단장이 된 키니어는 당시 루튼의 감독이었던 릴 푸실로를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감독이 됩니다. 특이한 것은 해임된 릴 푸실로 감독은 팀을 떠나지 않고 루튼의 코치로 남았으며 현재는 뉴캐슬의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키니어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키니어의 지휘 하 루튼은 첫 시즌에 리그2로 강등되었지만 다음 시즌 리그1으로 다시 승격하는데 성공합니다. 2003년 5월, 루튼에서 해임된 키니어는 무직으로 지내다가 2004년 2월에 디비전1(챔피언쉽 리그의 전신)의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으로 취임합니다. 키니어는 취임 당시에 강등권에 머물던 노팅엄을 14위까지 끌어올려 잔류시키는데 성공했으나 2004/05 시즌, 23경기 중 4승이라는 최악의 스타트를 보여주며 9개월만에 해임되었습니다. 키니어가 해임된 그 시즌에 노팅엄은 결국 강등되었습니다.2004년 12월 16일에 노팅엄에서 해임된 이후 팀 없이 헤매던 키니어는 대략 3년 반만에 2008년 9월 26일, 케빈 키건의 사임으로 공직이었던 뉴캐슬의 임시감독으로 임명됩니다.


키니어는 뉴캐슬이 원하는 화려한 경력의 명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키니어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즌 도중에 임명되는 '구원투수' 감독의 역할을 많이 수행했으며 그 역할을 비교적 잘 해냈습니다. 또한, 90년대 윔블던의 돌풍을 이끌었던 주인공이었습니다. 비록 팬들이 원하는 감독은 아니었지만 키니어가 현재 뉴캐슬의 힘든 시기를 잘 헤쳐나가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조 키니어 (Joe Kinnear)

출생 : 1946. 12. 27. 더블린

포지션 : 풀백

클럽경력 :
1965-1975 토튼햄
1975-1976 브라이튼

국가대표 경력 :
1967–1975 아일랜드 26 (0)

감독경력 :
19??-19?? 알샤르자
198? 인도
1987 네팔
1989 던캐스터
1992-1999 윔블던
2001-2003 루튼
2004 노팅엄 포레스트
2008- 뉴캐슬 유나이티드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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