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Surefoot' Frank Hudsp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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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4월 20일, 노스타인사이드의 퍼시레인에서 태어나 1963년에 죽은 프란시스 허즈페스(Francis Hudspeth)뉴캐슬 역사상 2번째로 많은 출장을 한 선수입니다. 허즈페스는 뉴캐슬에서 1910년부터 1929년까지 무려 19번의 시즌을 지냈습니다. 수비수로 왼쪽 풀백을 도맡았던 허즈페스는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안정적인 수비로 팬들에게 'Old Surefoot'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허즈페스는 주장이었고 휴이 갤러쳐가 영입된 이후로는 부주장을 맡았습니다. 또한, 허즈페스는 페널티킥에 통달하였으며 그가 뉴캐슬에서 기록한 37골 중 25골은 페널티킥으로 기록한 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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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출장한 적이 있는 허즈페스는 472번의 출장으로 팀 역사상 2번째 최다 출장자입니다. 참고로 뉴캐슬 최다 출장 선수는 지미 로렌스로 496번 출장했습니다. 현역이자 뉴캐슬의 주전 골키퍼인 셰이 기븐(현재 439번출장)이 마의 숫자 500 출장을 깨주길 기대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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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영국에서 제작된 트레이딩 축구 카드 中 '뉴캐슬의 주장' 허즈페스

프랜시스 허즈페스 (Francis Hudspeth)

출생 : 1890. 04. 20. 노스타인사이드

포지션 : 풀백

: 170cm

클럽 경력 :
1910-1929 뉴캐슬 472 (37)

국가대표 경력 :
1925 잉글랜드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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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2008.05.27 17:26

Len White : Legend that needs a reval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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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화이트(Len White)는 동시대의 선수였던 재키 밀번의 명성에 가려 그다지 알려져 있지만 그의 업적은 위대합니다. 화이트는 앨런 시어러, 재키 밀번에 이어 팀의 역대 3번째 최다 골 기록자이며 그가 밀번과 함께 이루었던 투톱진은 50년대 유럽의 최강이었다고 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어러와 밀번의 평균 한 경기당 득점이 각각 0.509, 0.504인 것에 비해 화이트의 한 경기당 득점은 0.569이었던 것을 보면, 렌 화이트의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이유는 단지 재키 밀번과 동시대의 선수였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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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캐스터 근처의 작은 마을인 스켈로우에서 태어난 화이트는 로테르담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화이트는 로테르담에서의 3년 동안 매해 뉴캐슬의 FA컵 연승행진을 끊어버리며 뉴캐슬 팬들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953년, 뉴캐슬은 렌 화이트를 £12,000의 이적액으로 영입합니다. 바바야로도 £1m를 받은 지금의 입장에서  £12,000는 코웃음만 나오는 액수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습니다. 뉴캐슬에서 초반에는 윙어로 뛰었던 화이트이지만 곧 재키 밀번과 함께 투톱진을 이루었으며 이 둘의 무적 투톱은 1950년대를 군림했습니다. 화이트는 놀라운 골기록들을 꾸준히 이어갔으며 1955년 뉴캐슬의 FA컵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1957년 밀번이 뉴캐슬을 떠나자 화이트는 뉴캐슬 전설들의 셔츠라 할 수 있는 9번을 이어받았으며 1962년에 허더스필드로 떠날 때까지 끊임없는 골 기록을 보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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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슬을 떠난 후 4년동안 허더스필드와 스톡포트에서 뛴 후 은퇴한 화이트는 1994년 6월 17일, 허더스필드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52년부터 1962년까지 뉴캐슬에서 활약했었던 렌 화이트는 269경기 동안 153골을 기록하며 시어러의 206골, 밀번의 200골에 이어 팀의 3번째 최다 골 기록자입니다. 하지만 재키 밀번과 동시대의 선수이어서인지 그의 명성은 다소 가려져있지 않나 싶습니다. 렌 화이트가 삼국지를 알았을리는 없지만 삼국지 주유의 명대사인 '하늘은 주유를 낳으셨으면서 어찌하여 제갈량도 낳으셨습니까?'와 가장 어울리는 뉴캐슬 레전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렌 화이트와 재키 밀번의 화려한 투톱 연계를 본 당시 툰 아미들은 '하늘은 렌 화이트를 낳으셨으면서 어찌하여 재키 밀번도 낳으셨습니까? 너무 감사하지 말입니다!'라며 행복했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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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화이트 (Len White)

출생
: 1930. 03. 23. 스켈로우

사망
: 1994. 06. 17.

포지션
: 포워드

클럽경력
:
1950-1952 로테르담 43 (15)
1952-1962 뉴캐슬 245 (142)
1962-1964 허더스필드 102 (37)
1964-1966 스톡포트  4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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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2008.03.27 17:04

'Supermac' Malcolm Macdon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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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생인 ‘수퍼맥’ 말콤 맥도날드('Supermac' Malcolm Ian Macdonald)는 자신의 고향 팀인 풀햄을 응원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유소년 팀들을 돌아다니며 실력을 키우던 맥도날드는 훗날 자신의 축구인생을 성공가도로 이끌어줄 해리 해슬람을 만납니다. 1967년 해슬람의 초대로 톤브릿지와 계약한 맥도날드는 해슬람이 2년뒤 풀햄으로 떠나자 해슬람를 따라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 팀인 풀햄으로 이적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적한 첫시즌, 풀햄은 강등되었고 왼쪽 풀백으로 뛰던 맥도날드는 경기에 많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1969년 7월, 풀햄은 £17,500의 이적금으로 맥도날드를 루턴에 이적시킵니다. 루턴에서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한 맥도날드는 풀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겠지만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화려한 모습, 과도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자신감 등을 기반으로 점점 성장했습니다. 맥도날드는 수비수들을 빠른 속도로 따돌리고 강력한 슈팅을 날리며 수많은 멋진 골들을 넣었고 루턴은 맥도날드의 대활약을 기반으로 3부리그로 승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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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리그에서 27골을 넣었던 맥도날드는 2부리그에서 30골을 넣으며 더욱 활약하였고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었던 조 하비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합니다. 조 하비 감독은 당시 영국 역사상 2번째 최고 이적금이었던 £180,000을 쓰며 1971년, 말콤 맥도날드를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데려왔습니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쇼비지니스가 무엇인지 아는 선수였던 맥도날드는 자신의 기자회견에 기사가 운전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당시 비평가들은 맥도날드를 '1부리그 수준이 아니다', '너무 왼쪽에 치우친 플레이를 보인다'라며 저평가 했습니다만 맥도날드는 곧바로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자신의 데뷔 경기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맥도날드는 뉴캐슬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데뷔하자마자 뉴캐슬 서포터들의 지지를 얻어낸 맥도날드는 70년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였습니다. 비싼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을 자주 방문하여 샴페인을 마시며 커다란 시가를 피우곤 했던 맥도날드는 자신만의 부티크를 소유했고 늘 깔끔한 차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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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의 골에 이은 골들은 서포터들을 흥분시켰고 맥도날드는 5년 연속 클럽의 최다 득점자가 되며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뉴캐슬에서 뛰면서 웨일즈를 상대로 잉글랜드 국가대표 데뷔를 치른 맥도날드는 1975년 4월 16일, 대기록을 세웁니다. 잉글랜드가 사이프러스를 상대로 5:0 대승하였을 때 5골을 전부 넣으며 잉글랜드 한경기 일인 최다 득점기록과 타이를 이룹니다. 이 기록은 현재에도 유효하며 당시 신문의 1면을 ‘수퍼맥 5 : 사이프러스 0’이라고 장식했습니다. 맥도날드는 A매치에 총 14번 출장하여 6골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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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과 1976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FA컵 결승전으로 이끌었던 맥도날드였지만 뉴캐슬에서 그의 생활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고든 리가 임명되기 전까지 난 뉴캐슬을 사랑했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맥도날드는 당시 감독인 고든 리와 갈등을 맺었습니다. 결국 1976/1977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고든 리 감독은 ‘수퍼맥’을 아스날으로 이적시켰습니다. 이 이적은 약간 특이했었는데요. 맥도날드의 이적금은 £333,333.33이었으며 ‘수퍼맥’은 뉴캐슬을 떠날 때 그가 롤스로이스를 타고 뉴캐슬에 도착했던 것처럼 럭셔리하게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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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에게 맥도날드를 판 고든 리의 결정은 뉴캐슬 서포터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아직까지도 논란거리로 남아있습니다. 고든의 통계는 그가 2경기에 1골씩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클럽이 이러한 선수를 다시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이버리에서도 맥도날드는 2시즌 연속 팀의 최다득점자가 되며 활약했으나 1978/1979시즌 로테르담과의 리그컵 경기에서 무릎부상을 입은 후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스웨덴의 유르고르덴 IF에서 2달 정도 머무른 뒤 맥도날드는 29세의 나이로 이른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선수생활동안 트로피를 들어본적이 없으며 단지 FA컵 결승전의 패배팀들(뉴캐슬, 아스날)에 속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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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맥도날드는 1980년부터 1984년까지 4시즌 동안 고향 팀인 풀햄의 감독으로 활동한 후 1987년부터 1988년까지 허덜스필드의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감독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사업의 실패로 파산한 후 2번째 부인과 이혼하는 불행이 겹쳤습니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던 그는 다행히도 1997년에 술을 끊는데 성공했고 영국 북동부의 센츄리 FM에서 버니 슬레이븐 (Bernie Slaven), 미키 호스윌(Micky Horswill)과 함께 ‘3명의 전설’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 중입니다. 또한, 前 축구스타들을 초대하는 ‘말콤 맥도날드와 함께’라는 30분 길이의 라디오토크쇼를 진행 중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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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맥’ 말콤 맥도날드는 뉴캐슬의 또다른 레전드인 조 하비가 “서포터들에게 재키 밀번의 재림이 될 수 있는 선수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뉴캐슬의 전설들을 상징하는 9번을 달고 뛰었고 그 9번에 걸맞는 선수였던 맥도날드는 놀라운 속도와 강력한 슈팅을 소유하고 있었고 키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중볼에도 강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맥도날드가 얼마나 빨랐냐 하면 TV쇼에서 맥도날드는 100미터를 무거운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은 채 10.4초에 주파했고 그 기록은 당시 영국 100미터 선수중 3번째로 빠른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원한다면 몬트리얼 올림픽의 100미터 릴레이팀에 출전할 수도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맥도날드는 그의 자서전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못 넣을까봐 걱정하지 않는’ (Never Afraid To Miss’) 선수였습니다. 볼튼의 수석코치였던 조지 멀홀이 했던 말이 ‘수퍼맥’ 말콤 맥도날드를 종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수퍼맥’이 아니에요. ‘수퍼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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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맥도날드 (Malcolm Ian Macdonald)

출생
: 1950. 01. 07. 풀햄

포지션
: 포워드

클럽 경력
:
1968–1969 풀햄 13 (5)
1969–1971 루턴 88 (49)
1971-1976 뉴캐슬 187 (95)
1976–1979 아스날 84 (42)
1979 유르고르덴IF 9 (2)

국가대표 경력
:
1972-1976 잉글랜드 14 (6)

감독 경력
:
1980-1984 풀햄
1987-1988 허덜스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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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2008.02.19 11:24

Joe Harvey : Thoroughly Black&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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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6일, 던캐스터 근처의 조그만한 마을인 에들링턴에서 태어난 조 하비(Joe Harvey)는 흑백의 피가 흐르는 진정한 뉴캐슬의 레전드이었습니다. 선수, 감독, 그리고 스태프로서 뉴캐슬에 일생을 바친 하비는 팀 역사상 최장기간 주장이었으며 감독으로서는 여태까지 팀이 얻어낸 트로피 중 마지막 트로피를 팀에 안겨주었습니다. 뉴캐슬의 레전드로 빛날 하비였지만 축구 인생의 시작은 초라했습니다. 고향팀인 에들링턴 레인저스에서 시간제 선수로 계약하였고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1936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뉴캐슬에서는 하프백으로 활약했으나 당시 하비의 포지션은 포워드였고 그의 실력에 별 인상을 받지 못한 울버햄튼은 6개월 후 그들의 하위구단인 본머스로 보내버렸습니다. 하지만 1938년, 본머스에서마저 방출 당하였고 브래드포드에 입단합니다. 그러나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하비는 영국 왕립 포대에 합류하였습니다. 군생활 중에도 주말에는 축구를 했던 그는, 그의 대대가 이동한 경로에 맞춰 하트풀, 에버딘, 던디 등의 게스트선수로 출전했습니다. 영국왕립포대에서 그는 PT조교였으며 제대할 때 그의 계급은 원사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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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944년 시즌에 17골을 넣으며 브래드포드에서 활약한 하비는 포워드 뿐만이 아니라 하프백도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의 모습을 보여주며 블랙번, 미들스브로 등을 포함한 많은 클럽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1945년 10월 20일,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었던 세이무르는 £4500의 이적금으로 그를 영입하는데에 성공합니다. 반슬리와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데뷔를 한 하비는 그 데뷔경기 바로 다음경기부터 주장이 되었고 그 이후 8년간 주장으로서 활약하여 뉴캐슬 역사상 최장기간 주장이 되었습니다. 뉴캐슬 오기전까지 주로 공격수로서 활약한 하비였지만 뉴캐슬에서는 하프백으로서 출전하였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외담을 하자면, 뉴캐슬로 이적했을 당시 하비는 아직 제대를 안한 상태였으며 따라서 세이무르 감독이 선수들에게 하비를 소개할 때 그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선수들은 하비를 보고 군인이 왜 그곳에 있는지 당황해했고, 어린 선수들로 이루어진 뉴캐슬 선수단을 보고 하비는 자신이 유스팀에 합류한 줄 알았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뉴캐슬의 첫시즌이 끝나갈무렵 하비는 제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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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원사로서 군복무를 마친 경험 덕분이었지만 하비는 뉴캐슬 선수들 사이에서 권위있는 선수였으며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른쪽 하프백으로 자리잡은 하비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며 늘 최선을 다했으며 경쟁이 심할수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팀동료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하비는 토요일 경기 전 점심시간에 기네스맥주를 마시거나 하프타임에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당시 그의 팀동료들도 마찬가지습니다. 하비의 뉴캐슬 생활은 늘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1946/1947 시즌, 하비는 팀동료인 쉐클턴과 함께 클럽숙소의 수준에 대한 불만으로 파업을 일으켰고 클럽은 그에게 공식 사과를 강요한 후 출장정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또한, 하비는 1952년 FA컵 결승전 티켓을 불법판매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소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모습과 뛰어난 실력 덕분에 그는 서포터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는 선수였습니다. 1947/1948 시즌에는 총 경기중 5경기만 결장하며 팀이 1부리그로 승격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1951년과 1952년은 주장으로서 FA컵 2연속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53년 5월 1일, 아스톤빌라와의 경기에서 뉴캐슬이 1:0으로 승리한 경기를 마지막으로 하비는 은퇴하였으나 34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즌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하며 활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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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초대 감독이기도 했던 윈터버텀 경에게 코치 교육을 받은 하비는 2년 동안 뉴캐슬에서 트레이너로 있었습니다. 감독의 욕심이 있었던 하비는 배로우, 워킹턴 등에서 감독으로서 경험을 쌓았고 1958년 뉴캐슬 감독에 도전했으나 그 자리는 찰리 미튼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팀의 감독을 되기 위한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1962년, 드디어 그는 뉴캐슬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1년간의 가계약이었으나 그 계약은 13년 동안 계속될 하비 감독 체제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팀에 감독으로서 합류했을 당시, 뉴캐슬은 바로 전 시즌에 강등된 상태였고 3년동안 팀을 재정비한 하비는 1965년, 2부리그 우승으로 팀을 승격시켰습니다. '뉴캐슬 출신 선수들과 네임발류가 높은 선수들의 조화'를 신념으로 삼은 하비는 윈 데이비스, 바비 몬쿠르, 테리 히비트와 같은 선수들을 기용하며 팀의 전력을 강화했으며, 1969년에는 인터시티즈 페어스 컵에서 우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트로피는 여태까지는 팀이 우승한 마지막 트로피입니다. 그리고 1971년에는 클럽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인 '수퍼맥' 말콤 맥도날드를 영입하였고 1974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하나 리버풀에게 0:3으로 패배하였습니다. 팬들은 트로피를 눈앞에 놓고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 하였으며 결국 하비는 1974/1975 시즌이 끝나갈 무렵, 팬들의 압박에 의해 사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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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는 뉴캐슬을 좋게 떠나지 못했지만 그의 뉴캐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그가 사임한 이후 점점 팀의 상황이 악화되자 팬들도 다시 그를 원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뉴캐슬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던 하비는 1989년 2월 심장마비에 의해 70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 하비는 70년 인생 동안 37년이나 뉴캐슬에게 바쳤으며 열정과 실력으로 헌신한 그가 뉴캐슬의 레전드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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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하비
(Joe Harvey )

출생
: 1918. 11. 06. 던캐스터

사망
: 1989. 02.

포지션
: 하프백

클럽 경력
:
1936 울버햄튼
1936-1938 본머스
1939-1945 브래드포드
1945-1953 뉴캐슬 290 (13)

감독 경력 :
1955-1956 배로우
1956-1958 워킹턴
1962-1975 뉴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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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2008.02.19 11:12

뉴캐슬 총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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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군
tags : 뉴캐슬, 축구
Football 2008.02.13 18:58

Frank Watt : Every saga has its begi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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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북동부의 열광적인 축구 클럽,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1892년 창단되었습니다. 뉴캐슬의 첫 경기는 189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열린 미들스브로와의 친선경기였습니다.. 지금의 툰아미를 생각하면 상상도 하기 힘들겠지만 초반 서포터들의 지지가 별로 없어 클럽 간부가 '뉴캐슬 사람들은 프로축구를 즐길 자격이 없다'라고 신문에 낼 정도였습니다. 그 말에 뉴캐슬 사람들이 자극받았는지는 몰라도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서포터들은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그리고 1895년 프랭크 와트 (Frank G. Watt)가 클럽 비서로 임명되었고 클럽 비서로서 그는 팀을 이끌었습니다. 와트는 팀 선정에 영향을 줄 수 없었던지라 정식 감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감독이라는 직업이 희미했던 당시를 생각하면 와트는 비공식적인 클럽의 초대 감독이었습니다. 참고로 창단해인 1892년부터 와트가 임명된 1895년 사이에는 감독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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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면 와트는 뉴캐슬의 기초를 다지는 중대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인이었던 와트는 실력있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팀의 전력을 향상시켰고 2부리그의 무난한 팀이었던 뉴캐슬을 1부리그의 강호로 성장시키며 현재 뉴캐슬의 기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와트의 지휘 아래 뉴캐슬은 1부 리그 4회 우승(1905, 1907, 1909, 1927)FA컵 2회 우승 (1910, 1924)을 기록하였습니다. 현재까지도 와트보다 감독으로서 FA컵 결승전에 출장한 감독은 퍼거슨 경 밖에 없을 정도로 와트 아래 팀은 성공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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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팀의 플레잉 감독으로서 임명된 앤디 커닝엄 (Andy Cunningham)이 뉴캐슬의 첫 공식 감독이 되며 와트는 감독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계속 뉴캐슬의 클럽비서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왓포드와의 FA컵 경기의 하루 전날, 클럽 비서로서 경기에 대한 준비를 마친 후 와트는 1932년 77세의 나이로 뉴캐슬에 있었던 그의 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팔자수염이 인상적이며 밀짚모자를 즐겨쓰던 그는 뉴캐슬에서 사랑받는 존재였고 뉴캐슬은 왓포드를 5:0으로 꺾으며 57,879의 관중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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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슬은 여태 총 1부리그 우승 4회, FA컵 우승 6회를 기록했습니다. 와트의 지휘 아래 그 중의 4회 우승과 FA컵 우승을 2회 한 것을 보면 팀의 역사에서 그가 얼마나 기여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팀의 초대 감독이었던 그가 이루어낸 것이 팀 전체의 2/3나 차지한다는 것은 대단하면서도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만큼 그 이후 팀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의미기 때문이죠. 뉴캐슬을 위해 죽는 날까지 뛰며 클럽에 일생을 바친 프랭크 와트를 떠올리며 분발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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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2008.02.12 21:11

Our No. 7 : Rob Lee


1966년 2월 1일 웨스트햄, 런던에서 태어난 롭 리(Robert Martin Lee)는 뉴캐슬의 중원를 이끌었던 선수였습니다. 키건 감독이 92/93 시즌에 £700,000의 금액으로 찰튼에 있던 리를 영입한 이후, 리는 10년 가깝게 뉴캐슬의 키 플레이어의 모습을 보이며 뉴캐슬의 레전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달글리쉬 감독 이후 임명된 굴리트 감독은 리를 계획에서 제외시킨 후 그에게 등번호조차 부여하지 않았고 리의 뉴캐슬 커리어가 위기를 맞았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후 롭슨 경이 임명된 후 다시 팀의 일원으로 돌아온 리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하여 뉴캐슬을 위해 활약했습니다. 롭 리는 뉴캐슬의 주장이었고 잉글랜드 국가대표선수이었으며 누구도 그가 뉴캐슬의 영웅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찰튼의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키운 리는 84/85 시즌, 주전자리를 꿰차는데 성공합니다. 순식간에 찰튼의 스타가 된 리는 미드필더와 포워드를 둘다 소화하며 85/86 시즌이 끝날 무렵 찰튼을 디비전 1로 승격시킵니다. 89/90 시즌이 끝날 무렵 찰튼은 다시 디비전 2로 강등되었지만 그때까지 리는 4년 동안 찰튼을 이끌며 활약했습니다. 롭 리는 강등된 찰튼에 2년 동안 머물렀으나 더밸리 스타디움으로 돌아갈 자금이 부족했던 찰튼은 92/93 시즌에 그를 이적시장에 내놓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2위였던 찰튼은 롭리를 그들보다 순위가 하나 높았던 팀에게 £700,000을 받고 리를 이적시킵니다. 바로 뉴캐슬 유나이티드였지요. 뉴캐슬 외에도 미들스브로가 롭 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전해진 바에 따르면, 롭 리는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었던 키건 감독의 '런던은 미들스브로보다 뉴캐슬에서 더 가깝다.'라는 설득에 넘어갔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가깝다'라는 의미는 실제거리가 아니라 소요시간이었는데요. 당시 런던-미들스브로 행 비행기보다 런던-뉴캐슬 행 비행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첫 시즌에 롭 리는 뉴캐슬이 93/94 시즌에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는데 일조합니다. 그 이후 몇년 동안 리는 키건이 이끄는 팀의 핵심이 되었으며 많은 프리미어 리그의 트로피에 도전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팀은 96/97 시즌에는 준우승을 하며 '엔터테이너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롭 리의 경기력은 상당했으며 키건이 그를 '영국 최고의 미드필더'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1997년, 키건 감독의 시대가 끝나고 달글리쉬 감독이 들어서자 롭 리는 뉴캐슬의 주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하지만 성공을 이끌어 내지 못한 달글리쉬 감독은 98/99 시즌이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해임되었습니다. 새 감독 루드 굴리트가 임명된 후 팀이 부진하자 주장이었던 롭 리는 굴리트를 비난했고 이에 대한 응징으로 굴리트는 리의 주장완장을 뺏은 후 그에게 등번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굴리트는 리를 유소년팀에 강등시켜버려 누가봐도 롭리는 굴리트의 계획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였죠. 하지만 다음 시즌이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굴리트 감독은 사임했고 바비 롭슨 경이 들어서자 리는 다시 스쿼드에서 그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굴리트가 뺏은 리의 기존 등번호인 7번은 키에론 다이어에게 주어졌었으나 다이어의 강요와 고집에 의해 리는 다시 그의 7번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롭슨 경 시대에서의 리는 90년대 중반에 보여주던 기존의 공격적인 모습을 버리고 상대의 플레이를 끊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01/02 시즌에 리는 뉴캐슬과의 계약을 연장하고 싶었으나 뉴캐슬은 02년 1월까지 재계약 협상을 미루길 원했고 리는 재계약의 방향에 대해 불쾌해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이적명단에 오르길 원했고 선수들과 팬들은 경악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롭슨 경은 매우 유감스러워했으나 리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하였고 2월 02년 리는 더비 카운티에 £250,000의 금액으로 이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뉴캐슬에서의 10년동안 그가 보여준 모습은 리가 뉴캐슬에서 레전드가 되었음을 뜻했습니다. 롭 리는 더비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결국 더비는 강등되었습니다. 그 후 03년, 리는 자신이 어릴때 지지하던 웨스트햄으로 이적하였으나 03/04 시즌동안 몇 경기 출전하지 못하였고 결국 자유계약으로 풀렸습니다. 리는 올드햄과 와이콤비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며 와이콤비에 입단한 후 리그 2에서 2시즌을 보낸 후 2006년 6월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 06년 10월, 롭리는 본머스의 감독을 노리고 인터뷰했으나 케빈 본드에게 자리를 빼았겼고 07년 7월에는 그의 前 팀 동료였던 워렌 바튼과 함께 차량 도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또한 07년 9월에 있었던 자선 프리미어 올스타 경기에서 뉴캐슬을 대표하여 출장하기도 했습니다.


필자는 롭 리가 뛰던 시절을 본적이 없지만 그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툰아미들이 그가 뉴캐슬의 레전드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뉴캐슬의 레전드인 앨런 시어러는 그에 대해 '스콜스와 개스코인 때문에 롭리는 대표팀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못 했지만 그는 훌륭한 미드필더였다. 그는 오른쪽 측면에서 뛴 적도 있고 그 다음에는 좀 더 공격적인 역할을 맡아 한 시즌에 20골을 득점한 적도 있으며, 나중에는 홀딩 역할까지 소화했다. 그는 미드필더 어디에서라도 뛸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현재 뉴캐슬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미드필더진을 생각해 볼 때 한없이 그리운 롭 리. 그의 플레이를 뉴캐슬의 후배들이 이어 나갈 수 있길 소망하며 글을 마쳐봅니다.




 
롭 리 (Robert Martin Lee)

출생
: 1966. 02. 01. 런던

포지션
: 미드필더

클럽 경력
:
1983–1992 찰튼 298 (59)
1992–2002 뉴캐슬 303 (44)
2002–2003 더비 48 (2)
2003–2004 웨스트햄 16 (0)
2004 올드햄 0 (0)
2005–2006 와이콤비 38 (0)

국가대표 경력
:
1994 잉글랜드 B 1 (0)
1994–1998 잉글랜드 21 (2)

뉴캐슬 주장
: 1997~1999
[前주장 : 피터 비어즐리(Peter Beardsley) / 後 주장 : 앨런 시어러(Alan Shea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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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군
Football 2008.02.01 15:59

견디기 힘든 직업 : 키건 이후 뉴캐슬에 오고 간 감독들



견디기 힘든 직업 : 키건 이후 뉴캐슬에 오고 간 감독들 (from Mirror)





키건 1993 ~ 1997

3부리그로 향하던 뉴캐슬에 취임. 감동과 기사도의 축구로 클럽을 프리미어리그 우승후보로 바꾸어 놓음.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흥미진진한 축구를 가져옴.

승률 55%

경기: 143
승: 78
패: 35
무: 30
골: 253
실점: 147





달글리쉬 1997 ~ 1998

리버풀에서 선수시절 그랬듯이 키건을 대체. 하지만 성공적이지 못함. 첫 시즌에 팀을 13위로 이끔. 2번째 시즌 첫 2경기 만에 경질.

승률 34%

경기: 56
승: 19
패: 18
무: 19
골: 69
실점: 61





굴리트 1998 ~ 1999

'섹시축구'의 창립자. 첫 시즌에 뉴캐슬을 FA컵 결승전으로 이끔. 하지만 앨런 시어러와 분쟁을 일으킨 후 그를 벤치에 앉히자 단 한 사람의 승자가 나옴. 그리고 그 사람은 네덜란드인이 아니었음.

승률 27%

경기: 41
승: 11
패: 18
무: 12
골: 54
실점: 66





롭슨 1999 ~ 2004

취임 후 첫 홈경기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8-0으로 꺾음. 3위, 4위로 시즌을 마친 성공적인 시즌들도 있었음. 하지만 시즌을 나쁘게 시작한 후 경질됨.

승률 44%

경기:188
승: 83
패: 54
무: 51
골: 294
실점: 235





수네즈 2004 ~ 2006

£50m을 썼으나 여러 선수들과 분쟁을 일으켰으며 팬들의 지지를 얻지 못함. 오웬을 레알에서 데려왔으나 경질시 뉴캐슬은 15위를 달리고 있었음.

승률 29%

경기: 56
승: 16
패: 23
무: 17
골: 58
실점: 76





로더 2006 ~ 2007

인터토토컵을 이기면서 1969년 이후 클럽의 첫 트로피를 얻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음. 하지만 10경기 중 1경기 밖에 이기지 못하며 뉴캐슬을 떠남.

승률 40%

경기: 52
승: 21
패: 20
무: 11
골: 64
실점: 60





앨러다이스 2007~2008

앨러다이스가 취임한지 얼마 안되어 새 구단주가 나타남. 실용적인 팀을 만드는 그의 명성에 맞게 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 하지만 취임 후 단지 239일 후 경질.

승률 33%

경기: 21
승: 7
패: 9
무: 5
골: 27
실점: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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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군
Football 2008.01.19 00:24

마이크 애쉴리, 그는 누구인가?

[빅샘과 함께 폭소하는 애쉴리. 둘 사이의 관계는 문제없음.]

잉글랜드 북동의 열정적인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훗날 07/08시즌을 클럽의 터닝포인트로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툰아미는 애증의 대상이었던 프레디 셰퍼드 前 구단주를 드디어 물리치고(?) 은둔자 마이크 애쉴리를 맞이했으며 기존 '수네즈, 로더'와는 느낌부터 다른 '빅샘' 샘 앨러다이스 감독 체제 하에 대폭적인 리빌딩을 시작하여 팀혁명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물론 셰퍼드 前 구단주가 빅샘 감독을 임명한 후 얼마 안되어 사임하고 애쉴리가 나타나 빅샘 감독의 입지가 다소 불안한 느낌은 있지만 둘은 관중석에서 서로 웃으며 같이 경기를 관전하는 등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합니다. 애쉴리는 크리스 모트를 구단주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운영은 모트 구단주에게 맡기고 있으며 자신은 뉴캐슬의 소유주로서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시즌 내내 뉴캐슬 레플리카를 입은채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하여 팬들에게 다가왔으며 특히 對 선더랜드 원정경기에서는 일반 관중석에서 팬들과 함께 응원하여 대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처음 애쉴리 인수설이 일어날 때 기사마다 사진은 이것뿐. 아마 이 사진 말고는 사진이 없었던게 아닐런지.]

뉴캐슬의 소유주로서 유명해진 마이크 애쉴리지만 뉴캐슬을 인수하기 전에는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애쉴리가 뉴캐슬을 인수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영국의 신문인 '가디언'은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고 실패했습니다. '가디언'은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비밀에 휩싸인 백만장자는 허트포드샤이어 가장자리의 커다란 집에서 혼자 사는 걸로 추정된다. 그 건물은 나무들로 숨겨져 있으며 집에서부터 반마일에 위치한 입구의 굳게 닫힌 문에는 CCTV 카메라들이 설치되어 감시하고 있다. 애쉴리의 이웃들은 그를 본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근처 술집을 찾아갔으나 누구도 애쉴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몇달전, 지역 신문사에서 애쉴리에 대해 좀 더 알아내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결국 자신들의 신문에 직접 애쉴리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는 광고를 실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처럼 애쉴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이혼시 £50m 상당의 합의금을 지불한 것이 영국 법정 역사상 가장 큰 이혼합의 중 하나였다는 점 정도가 알려져 있습니다.

 
[애쉴리의 Sports Direct. 여기에도 돌베르님이 찾는 로베르 마킹은 없었음.]

80년대에 학교를 떠난 애쉴리는 'Sport&Ski' 체인점들을 런던 내외에 열었습니다. 90년대 후반 'Sports Soccer'로 이름을 바꿨으며 영국 전역에 걸쳐 100개 이상의 체인점들을 열었습니다. 자영업자인 애쉴리는 영국기업등록소에 등록되지 않아 그에 대한 정보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애쉴리가 창업한 'Sports Direct International Plc'는 400개가 넘는 영국 체인점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Sports World', 'Lillywhites', 'Gilesports', 'the Original Shoe Company' 등의 체인점들도 이에 속합니다. 2006년에는 JJB Sports를 뛰어넘어 영국의 최대 스포츠물품 소매기업이 되었습니다. 애쉴리는 브랜드들을 매수하며 자산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가 소유한 브랜드 중에는 Donnay, Dunlop Slazenger, Karrimor, Kangol, Lonsdale 등이 있습니다. 애쉴리는 인수를 고려하여 £9m 상당의 Umbro 주식을 매수하였고 Umbro와 장기 계약을 맺었습니다. 애쉴리는 Blacks Leisure의 29.% 주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JD Sports의 19%를 소유하고 있고 JJB Sports의 주식도 소유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애쉴리의 기업라이벌이자 위건의 스폰서인 JJB Sports. 위건에게 진다면 선수들 각오해야 할지도..]

2000년, 애쉴리는 공정거래청에게 스포츠소매기업들이 레플리카들 가격을 단합하기 위해 모인 증거를 제공하여 그의 사업경쟁자들 상대로 밀고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애쉴리는 Allsports의 회장인 David Hughes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가했는데 그곳에서 JJB Sports의 창립자인 Dave Whelan은 애쉴리에게 "'영국 북부에 (경영자들의) 클럽이 있는데 자네는 들어올 수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셰퍼드는 구단 재정을 말아먹고 도망친거였나..]

2007년 5월 23일 존 홀 경의 41.6% 주식을 매수하며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인수를 시작한 애쉴리는 2007년 7월 7일 셰퍼드 前 구단주가 그의 28% 주식을 애쉴리에게 매도하기로 합의하며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총 £134m을 사용하여 주식의 100%을 매수,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한 애쉴리는 자신의 개인자산을 통해 뉴캐슬의 빚을 절반이나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후 크리스 모트 구단주에 의해 알려진 바로 의하면 만약 애쉴리가 빚을 갚아주지 않았다면 안될 정도로 뉴캐슬은 카드로 만든 집처럼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對 선더랜드 원정 더비. 관중석에서 팬들과 함께 응원하는 애쉴리.]

또한, 애쉴리는 왜 자신이 뉴캐슬 경기때마다 스미스의 17번 유니폼을 입는지 밝혔습니다. 그는 새로 영입된 뉴캐슬 선수 앨런 스미스가 팀을 위해 열심히 뛰려는 놀라운 열정과 의지를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 애쉴리가 매경기마다 뉴캐슬유니폼을 입고 나타난다는 사실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열린 선더랜드와의 경기때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선더랜드 측에서는 애쉴리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VIP석에서 뉴캐슬 유니폼을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경기 바로 전날, 애쉴리가 뉴캐슬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뉴캐슬 팬들과 함께 어웨이 관중석에서 관전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고 하프타임동안 애쉴리는 어웨이석의 모든 뉴캐슬 팬들에게 맥주를 돌리려고 하였으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직원들에게 제지 당하였습니다.
 
애쉴리가 뉴캐슬을 인수하였을 때 팬들은 기대반 걱정반에 휩싸였습니다. 길고 암울했던 셰퍼드 前 구단주 시대가 끝나자 모두 기뻐했지만 새로 나타난 마이크 애쉴리는 말 그대로 듣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그가 유능한 경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은 클럽의 미래보다는 자신의 재산만 불리려는 목적으로 구단을 인수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쉴리는 경기마다 뉴캐슬의 흑백을 입고 경기를 관전하며 매 골마다 기뻐하며 구단의 소유주보다는 하나의 팬으로써 툰아미들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나긴 은둔생활을 끝내고 뉴캐슬 소유주로서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마이크 애쉴리, 그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정보들이 부족하지만 관중석에서 보여주는 그의 뉴캐슬 사랑은 밝은 미래를 예고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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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군
Football 2007.12.27 12:34

앨러다이스에게 이적자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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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을 영입한 앨러다이스 감독

뉴캐슬 구단주 크리스 모트는 1월에 앨러다이스 감독이 이적자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뉴캐슬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으로 인해 새해에 4명의 선수를 잃을 예정이며 앨러다이스 감독은 수비 자원이 줄어들 것이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여름 이적시장에서 9명의 선수를 영입한 이후 뉴캐슬 이사회는 더이상의 지출을 지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트 구단주는 이러한 상황을 감독에게 확실하게 전달했으며 어느 선수라도 영입된다면 그 선수는 구단의 미래를 밝게 할 어린 선수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모트 구단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9명의 선수를 영입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 특히 수비 부분은 선수들의 팀워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수비수 2명을 영입한다고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약 1월에 새로운 영입을 한다면 그 대상은 뉴캐슬에 오랜 기간 동안 남을 선수들이지 당장 1군 주전을 뛸 선수는 아닙니다. 우리는 최고의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는 1군 스쿼드를 만들어 가려고 하지만 그 동시에 유소년 선수들의 수준을 높여 선수들을 영입하는데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유소년 부분은 역사적으로 뉴캐슬이 큰 문제를 가진 부분은 아니었지만 아스날을 보면 어린 유망주들을 영입하여 개발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스카이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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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군
tags : 뉴캐슬, 축구
Football 2007.12.13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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