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前 야구선수, 前 방송인 강병규씨가 트위터에서 양준혁 선수를 맹비난하여 이슈화 되었습니다. 다소 과격한 트윗들이었기 때문에 '저 사람이 이제 눈에 보이는게 없나보다'하고 말았었는데요. 어제 국민일보 쿠키뉴스에 올라온 강병규씨 인터뷰를 읽고 다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어떤게 진실인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저도 결국 예전 강병규씨가 일으킨 논란들로 인해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본 것이었겠지요.
이 인터뷰에서 강병규씨는 프로야구 선수협의 비리에 대해 폭로하였습니다. 선수협이 없던 시절에는 2군 선수들은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는데 2000년도에 프로야구선수들을 대변하는 선수협이 창립됩니다. 사실 제대로 된 노조가 하나도 없었다는게 오히려 이상한거죠. 그런데 선수협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최근 뇌물비리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강병규씨는 설립 때부터 있었던 갈등 및 책임전가 등에 대해 폭로하고 선수협의 개혁이 시급하다는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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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①] 강병규 “프로야구 선수협을 아십니까”
(출처: 국민일보 쿠키뉴스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
[쿠키 스포츠] 강병규는 상습 도박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과자다. 하지만 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 대변인으로 산파 역할을 한 과거를 알고 있는 야구 팬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2008 베이징올림픽 연예인 응원단으로 혈세 낭비 논란의 중심에 섰고, KBS 드라마 ‘아이리스’의 배우 이병헌과 명예훼손 맞소송, 드라마 제작자 정태원과 폭행 논란의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재판을 진행 중이다. 여기에 사기 혐의로 피소된 재판도 받고 있다. 이러한 ‘악동’, ‘사고뭉치’ 이미지는 OB 베어스 시절 유망주로 출발해 SK 와이번스에서 선수협 때문에 20년간 손에 잡았던 야구공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야구인 이미지 자체를 희석시켰다. 선수협 대변인으로서 프로야구 선수들을 지켜달라고 외치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자신의 트위터에서 야구 팬들에게 신(神)으로 불리는 ‘양신’ 양준혁과 ‘종범신’ 이종범의 실명을 거론하며 선수협을 망쳤다고 맹렬한 비판을 가했기 때문. 이유가 궁금해졌다.
강병규를 서울 강남 모처에서 10시간동안 인터뷰했다. 그는 사전에 두 가지를 부탁했다. 하나는 자신의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만큼 사진 촬영에 응하지 않겠다는 것. 또 하나는 자신의 주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명과 사실을 토씨 하나 빠짐없이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이슈의 중심으로 부각됐다. 인터뷰 요청도 많을 것 같다.
“여러곳에서 연락이 많이 오기는 하는데 사실 기자들이 딱히 뭐에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양준혁 선배(이하 존칭 생략)와 이종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물어보는데 그들을 비판한 것은 근본적으로 선수협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선수협을 모르는 기자들이 더 많다. 11년 전 이야기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의사소통 자체가 원활하지 않다. 선수협 이야기를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싶다.
-선수협 이야기를 해보자. 30대 야구 팬들 정도는 결성 당시 모습을 기억하지만 10대나 20대 팬들은 잘 모른다.
“1995년으로 기억한다. 한일 슈퍼게임이 있고 그랬다. 우리 팀(OB 베어스) 김상진 선배가 선수들 모임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참여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최동원 선배도 하지 못한 일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무조건 찬성한다고 했다. 신인 때부터 너무 화가 났던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인가.
“고졸 신인으로 입단했는데 연봉계약 때 정말 너무하더라. 당시 최저 연봉이 600만원이었다. 고졸 출신은 800만원, 대졸 출신은 1200만원. 그냥 이게 룰이었다. 그걸 내가 최초로 깼다. 고졸이지만 1200만원 주지 않으면 계약을 안 하겠다고 했다.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팀 상비군에 뽑히기도 했는데 구단이 날 스카웃해서 대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고졸, 대졸 이게 엄청났다. 한 번 생각을 해보라. 보통 회사에서 연봉 협상을 어떻게 하나? 얼마 받고 싶다고 하면 회사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서로 준비한 논리로 이야기 해보고 절충점을 찾자고 하지 않나? 하지만 그 때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모기업에서 받은 예산을 갖고 샐러리 캡처럼 나누는 수준이었다. 연봉 계약이 아니라 연봉 지정, 연봉 통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수협 까지는 아니지만, 신인 시절부터 이런 불합리한 구조에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연봉 협상에 진통이 매년 많았을 법 하다.
“실무협상 하는데 판을 엎고 나온 적 많다. 20~23살 때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는 야구 판이라는 것을 이미 느꼈다. 완전 주종 관계다. 전부 구단에 속하고 구단에 의하고…. 전부 이런 식이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더라. 노예 계약이라고 보면 된다.”
-선수협 결성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김상진 선배에게 난 무조건 한다고 말했다. 근데 며칠 후 말이 없는 거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더니 LG 트윈스 이상훈하고 일부는 강하게 주장하는데 삼성 양준혁이랑 몇 명이 삼성은 노조가 없어 자기네들은 참여하기 곤란하다고 했다더라. 그래서 아예 모임 자체가 취소됐다. 한일 슈퍼게임 당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다른 팀 선배들도 많이 빠졌다. 당시 난 연차도 안 되고 지명도도 떨어져서 모임 결성에 따라는 갈 수 있지만 앞장 설 형편은 안 됐다. 하지만 연봉으로 구단과 하도 싸워서 ‘언제 내가 자리 좀 잡으면 세게 한 번 붙는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2000년에 선수협이 결성된다.
“내가 뛰어난 투수는 아니지만 99년도에 최고 성적을 거뒀다. 13승이다. 사실 97~99년까지 3년 동안 OB가 내게 정말 잘해줬다. 연봉도 후하게 줬고 대우 자체가 정말 좋았다. 김인식 감독님이 팀과 프런트가 잘 협조하는 분위기로 만들어 주셨다. 99년 두산으로 팀 이름을 바꾸면서는 OB에서 서운했던 부분을 두산이 정말 잘해줬다. 더구나 당시는 두산 구단주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로 계실 때다. 난 선수협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누가 하자고 하든, 다른 선수들은 해도 난 정말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선수협 결성에 앞장 선 것도 모자라 대변인까지 됐다.
“2000년 겨울 태국에 있는 누나 집을 다녀오니 양준혁에게 전화가 왔다. 당시 난 양준혁과 개인적으로 전혀 만난 적도 없었다. 야구장에서 보면 선배니까 인사나 하는 정도였다. 아예 일면식 자체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통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 전화가 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두산 김태형하고 김민호가 전화를 안 받는데 왜 안 받느냐고 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냐고 하니, 나더러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 선배들이 전화를 안 받거나 받더라도 금방 끊고는 다시 전화 한다고 하더니 연락이 없었다.
그대로 전해주니 양준혁이 두산 너희들 너무한다고, 서울 애들 정말 의리 없다고 했다. 선수협을 결성하기로 하고 총회를 갖기로 약속했는데 실망이다, 막 이렇게 하소연을 하더라. 그래서 우리만 빠졌냐고 재차 물었다. 그렇다고 하는데 갑자기 화가 나더라. 평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데 두산만 빠졌다고 하니까. 그래서 나 혼자라도 일단 가겠다고 했다.
당시 여의도 사무실로 기억한다. 권시형(현 선수협 사무총장)의 후배들이 만든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 사무실에서 모였다. 양준혁, 송진우, 김기태, 유지현, 박정태, 최태원 등이 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는 팀 해체 직전이라 거의 전 선수들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갔더니 아주 깜짝 놀랐다. 걱정이 99%였다. 의욕은 1%쯤 있었나 싶다. 모두들 우리가 이러다 다 잘리지 않겠냐, 너네 확실히 나올 거냐, 이런 이야기들만 하고 있었다. 선수협 총회 준비하는 장소가 아니라 잔뜩 겁만 먹은 분위기였다.”
-권시형 총장과 처음 만났다.
“그 때 권시형을 처음 봤다. 당시 민주당 정책전문위원인가 그랬을 거다. 나름 당에 파워가 있으니 양준혁이 선택하지 않았나 싶었다. 외국에서 매니지먼트 공부도 하고 우리나라의 열악한 스포츠환경을 잘 지적했다. 에이전트도 있어야 하고 초상권이나 중계권료도 가져와야 하고 연봉도 지금보다 더 올리는 것이 맞다고 했다. 평생 운동만 한 선수들이 뭘 알겠나. 일단 연봉 올리자는데는 전부 동의했다.”
-어떤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오고 갔나.
“그런 것도 없다. 선수협 만들고 총회를 갖자고는 하는데 아주 중구난방이었다. 이곳에 모인 이유를 이야기 하고, 우리가 뭐가 불만이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논해야 하는데 너희 몇 명 나오냐, 장악은 다 했냐, 너희 안 나오면 안 된다, 너희부터 총회에 입장해라, 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몇 명은 선수협 결성 자체를 아예 반대하더라. 그냥 다음에 하자, 없었던 일로 하자, 최동원 선배도 못 해낸 일이다, 이러니 총회 자체가 무산될 뻔 했다. 일부 선수들은 이미 구단과 약속을 하고 나왔다더라. 자기들만 빠지면 모양새가 좀 그러니까 일단 가서 분위기를 살펴보고 오겠다는 식으로 구단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비밀로 만나기로 했는데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선수협이 결성되고 2000년 1월 창립총회가 열린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창립총회를 여는데 반이 기자들이었다. 평생 살면서 그렇게 많은 기자들 처음 봤다. 국내 프로야구 8개 구단 대표와 200명의 선수들이 모였는데 정말 웃기는 건 그 때까지도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었다. 전혀 없었다. 회장조차 결정되지 않았다. 모이는 건 저녁에 모였는데 창립은 새벽에 했다. 5~6시간은 족히 걸렸다.”
-보통 단체 창립총회가 길긴 하지만 1시간 내를 넘지 않는 편인데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나.
“8개 구단 대표가 모였으니 선수들이 입장하고 총회를 열면 되는데 거기서도 그냥 다음에 하자고,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는 거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겨우 다독여 총회를 하자고 하는데 또 시비가 불거졌다. 회장을 누가 하는지를 갖고. 그냥 양준혁이 하면 되는데 자신은 너무 강성 이미지가 있으니 송진우더러 하라고 했다. 해태로 온 지 1년도 안 돼 이호성 허락도 안 받고 해태 대표로 왔으니 부담감이 심했을 거다. 실제 이호성이 양준혁을 만나서 뭐라고 한 적도 있다. 송진우는 절대 회장 안 한다고 계속 고사했다. 지금은 회장님으로 불리지만 당시에는 정말 회장을 안 하려고 했다. 그걸 갖고 두 시간은 설득한 것 같다. 회장 선임을 창립총회에서 하는 코미디가 어디 있나.”
-송진우를 회장으로 뽑고 나서도 시간이 더 걸렸다고 들었는데.
“말도 마라. 두 시간 걸려서 회장을 뽑았는데 이제는 어느 팀이 먼저 입장하는 것을 두고 다퉜다. 선수들이 63빌딩에도 있고, 포장마차에서 우동도 먹고 있고, 버스 안에 대기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입장을 하지 않는 거다. 서로 눈치만 보고 절대 먼저 들어가려는 팀이 없었다. 삼성은 LG만 쳐다보고 있었다. 김기태는 유지현에게 LG 몇 명 왔냐,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유지현은 왜 우리 팀 이야기를 하냐, 알아서 하겠다고 하니 말대꾸한다고 욕하고. 멱살 잡고 고성 오가고 몸싸움 벌어지고 막 그랬다.”
-결국 어느 팀이 맨 먼저 입장했나.
“두산이다. 지금도 17명의 후배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하도 입장하는 문제로 싸우고 있어서 내가 박명환에게 지금 입장하는 걸로 다투는데, 그냥 우리가 먼저 입장하자고 그랬다. 이경필, 정수근, 김동주, 홍성흔에게 전부 전화했다. 그랬더니 얘들이 ‘그럼 우리가 먼저 들어갑시다’라고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도 고마웠다. 그때 후배들을 생각해서라도 선수협 일을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산이 입장하니 다른 팀들은 입장 안 할 명분이 사라지지 않겠나. 두산 따라서 전부 입장했다. 그렇게 200여명의 선수들이 모였다. 회장 뽑고 선수들 입장하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나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의 사단을 기억하는 팬들이 많지 않겠나. 긴 설명 하고 싶지도 않다. 김기태가 삼성 선수들 끌고 나갔고, 안 따라 나온다고 고함 지르고 난리 치고. LG는 삼성이 나가는데 우리는 왜 남아 있냐고, 우르르 따라 나가고 그랬다. 아주 가관이었다. 200여명 모였던 선수들이 8개 구단 수는 맞췄지만 100명도 남지 않았다. 지금도 그 자리에 있었던 야구 팬들에게 너무 죄송한 기억이다. 김기태가 나가는 순간 나는 야구를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산 대표는 나오지도 않았고, 얼떨결에 내가 대표를 하게 됐다. 최동원 선배가 구단에게 보복 당한 학습효과가 있어서 그렇게 안 되려고 진짜 총회 개최 의지를 다지고 또 다졌는데….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선수협 결성 목적은 뭐였나.
“당시 2군 및 대부분 선수들의 형편은 정말 최악이었다. 끼니 걱정을 했을 정도다. 야구 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 선수들이 나서서 힘없는 2군 선수들을 보호하자는 의도였다. 최저 연봉을 개선하고, 구단의 노예 종속 관계인 프로야구 규약을 개선하고, 선수 권익을 보호하고…. 일단 뭐든 개선해야 했다.”
-그렇게 선수협이 결성됐고 대변인을 맡아 수려한 언변을 뽐냈다.
“이제야 말하지만 당시 대변인 자체가 없었다. 아예 그런 직책은 있지도 않았다. 원래 발기문을 읽기로 돼있었는데 양준혁이 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자들 수백 명이 앞에 있으니 갑자기 나보고 하라고 하더라. 단지 사투리를 안 쓴다는 이유로. 싫다는 눈치로 째려보니까 계속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했다. 당시만 해도 노조라고 하면 기업이나 국민들이 엄청 안 좋은 시각으로 볼 때다. 노조는 시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상황에서 노조 대변인을 한 셈이다.”
-창립총회 마친 기분이 궁금하다. 벅차오를 법도 한데.
“전혀. 완전 망했다는 분위기였다. 김기태가 삼성 선수들 때리려고 하면서 데리고 나갔지, 그날 벌어진 온갖 안 좋은 모습을 국민들이 다 봤다고 생각하니 구단도 내쫓을 것이고 여론도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소란이 벌어지니 선수들 동요가 상당했다. 기자들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고. 총회 자체가 파장 분위기로 치닫는데 아무도 설명을 안 하는 거다. 갑자기 울컥해서 내가 ‘여러분, 기자 분들, 팬 분들 오늘 우리가 창립을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왜 김기태가 저랬는지 이따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왜 싸웠는지 궁금하시죠? 우리가 순수한 의도로 이 곳에 모였다는 것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했다. 선수들이 다 나가려다 반이 남었다. 집에 가려던 기자들이 다시 왔다. 대변인, 아니 인생 전체에서 가장 잘한 코멘트라고 생각한다. 대변인 때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고.”
-새벽 몇 시에 끝났나.
“2시쯤 끝났다. 다들 너무 지치고 힘이 빠져서 과연 법률적으로 이 정도 선수 인원을 갖고 선수협이 발족 가능한지만 자문하고 뻗었다. 술 마실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고 이제 망했다는 생각이 99%, 그래도 이제 시작은 했다는 생각이 1%였다. 김기태에 대한 원망도 쏟아졌다. 어떻게 총회에서 그럴 수 있는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다. 다음 날부터 구단에게 협박도 오고 회유도 들어오고 하니까 8개 구단 대표들이 합숙을 시작했다. 하일성 당시 해설가가 선수들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많이 도와주셨다. 당시 분위기는 선수협 도와주면 절대 안 되는 분위기였지만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 두산 박철순 선배도 도와주셨고.”
-두산 구단은 뭐라고 했나.
“난리가 났다. 양준혁하고 내가 선수협의 간판처럼 나오니 마치 내가 선수들 모이라고 한 것처럼 됐다. 구단주 입장에서는 얼마나 나를 미친놈이라고 봤겠나. 진짜 구단이 잘해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은 거다. 하지만 전혀 후회는 안 했다. 2~3년 구단에게 고마웠고 잘 나갈 수 있지만 그동안 수년 간 선수 계약에 대한 울분이 있었고, 그 울분이 더 크니까. 2군 선수들 너무 불쌍하니까. 잘했다, 잘한 일이다, 이렇게 최면을 걸었다.”
-김인식 감독은 뭐라고 했나.
“구단 홍보팀이나 운영팀은 너 왜 그러냐, 미쳤냐고 했다. 선수들도 날 피했다. 가장 친한 후배들도 내 눈을 피했다. 선배들은 전부 날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감독님은 오죽 했겠나. 그깟 선수 한 명을 책임 못 졌다고 구단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줬겠나. 너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하시길래 ‘죄송합니다. 갑작스런 결정은 아니고 이전부터 이런 점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고 말씀드렸다. 감독님의 ‘알았다’고 하시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도 너무 죄송할 따름이다.”
-무척 외로웠겠다. 선수들이 그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구단 대표들 전부 외로웠다. 심지어 양준혁은 해태 이호성이 못 가게 해서 선수를 데려 오는데도 무척 고생했다. 해태에서 ‘네가 무슨 대표냐’고 했을 정도다.”
-그렇게 길거리로 나섰다. 시민들의 지지가 상당했다.
“KBO와 구단들이 모두 방출시키겠다고 했다. 프로야구 개막을 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선수협을 지지해 달라는 전단을 돌리고 서명을 받으러 서울역, 강남역, 동대문, 남대문, 경실련, 참여연대, 국회등 정말 전국을 다 돌아다녔다. 사인만 수만 장을 한 것 같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야구장에 있어야 할 선수들이 추운데 고생하니 안쓰럽게 보셨던 것 같다. 손을 꼭 붙잡아 주면서 힘내라고, 뭔지 잘 모르지만 우리 선수들 고생 많다고, 꼭 다시 야구공을 잡으라고 해주셨다. 그 때 만난 분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정말 감사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전부 은인들이다.”
-선수협이 실질적으로 대중에게 인정받는 시점이 언제라고 생각하나. 이승엽 가입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MBC ‘100분 토론’ 나갔을 때라고 생각한다. ARS로 찬반 투표를 하는데 역대 최고로 찬성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5000대100 수준으로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국적인 방송에서 너희들이 하는 일이 맞다고 검증을 받은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잘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겠구나, 우리가 미친 놈들은 아니구나, 다들 공감을 하고 있구나, 팬들이 버리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송 나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기분 좋게 잤던 것 같다.”
[쿠키 스포츠] 강병규는 양준혁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다. 양준혁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선수협을 만들고 나중에 뒤로 빠졌다는 것이다. 선수협을 버렸다는 격한 표현까지 썼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선수로 야구 팬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선수협 부분에 있어서는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러면서도 강병규는 양준혁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선수협을 함께 만든 야구 선배로서 선수협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만 내준다면 다행이고 오히려 고마울 것이라고 했다.
-양준혁이 선수협에 어느 정도 관여했다고 생각하나.
“선수협 조직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양준혁의 머리에서 나왔고 끝난 거다. 나중에 정부와 협의해서 실체를 인정받고 후일을 도모한 것도 난 끝까지 반대했다. 양준혁은 야구를 안 할 각오로 선수협을 만든다고 말했다. 아니, 선수협이 만들어져도 야구를 안 한다고 했다. 그 정도로 각오가 대단했다. 그 말을 난 믿었다.”
-현재 양준혁은 송진우와 더불어 선수협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요즘 내가 트위터에서 매일 양준혁을 비판하는데 왜 아무 말도 못하는지 아나. 정말 감동스러운 두 장면이 있다. 아까 말했지만 선수협 창립총회 하는 날 정말 너무 혼란스러웠다. 63빌딩에 모인 상황에서도 그냥 하지 말자, 다음에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양준혁의 표정이 기억난다. 정말 죽을 맛 그 자체였다. 원래 쿠데타는 성공하면 대통령이 되지만 실패하면 죽는다. 창립총회가 실패하면 양준혁은 유니폼을 벗는 거였다. 벗을 각오는 했지만 진짜 벗는 거였다. 그는 8개 구단 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딱 일어나더니 ‘난 죽어도 한다. 혼자라도 끝까지 간다’고 말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서 내가 그랬다. ‘이 정도인데 우리 같이 따라가자. 저런 각오로 하는데 같이 가 보자’고….
또 추운 겨울에 매일 전국을 돌며 선수협 지지해 달라고 외치면서 고생할 때 하루는 내게 ‘병규야, 난 너만 믿는다. 아무도 안 믿는다. 너랑 나랑 둘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 너만 변하지마’라고 했다. 갑자기 벅차서 내가 ‘알았어. 형이나 변하지마’라고 했다. 사실 다른 대표들은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양준혁과 내가 결사대 2명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렇게 말했던 사람이 지금은 선수협을 버렸다. 내 얼굴을 어떻게 보겠나.”
-두 사람의 우정이 가장 빛났던 순간이겠다.
“결사대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은 상상도 못하지만 롯데호텔 지하식당에서 구단주들이 조찬모임을 하는데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갔던 사람이 나다. 하도 선수협을 안 만나주니까. ‘그래도 선수니까 밥은 사주겠지’라는 생각에 무작정 찾아가 문에 발길질을 해댔다. KBO 직원들하고 몸싸움도 했다. ‘진짜 미친 놈’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어린 선수들이 들으면 전부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양준혁은 선수협을 버리지 않았고 2001년에 집행부가 이호성 체제로 넘어간 이유도 ‘후일 도모’라고 말한다.
“진짜 내가 화나는 게 그거다. 선수협 1기가 퇴진하고 2기로 넘어갔는데 2기 회장이 누구였는지 아나? 이호성이다, 해태 이호성. 이호성은 선수협 창립 자체를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뭐가 후일 도모인가. 난 정말 양준혁에게 듣고 싶다. 왜 선수협을 이호성에게 넘겼고 이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는지…. 말은 이렇게 한다. 선수협의 실체를 인정 받았다고. 그건 말장난이다. 그러면 선수협을 만들 때 실체만 인정 받는 수준까지 의견을 모았어야지. 구단하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던 사람이 선수협 자체를 반대하던 사람에게 선수협을 넘겼다. 프로야구의 공멸을 막기 위해? 표현은 좋다. 그래서 넘긴 사람이 이호성인가. 책임회피, 직무유기. 이런 것도 아니다. 그냥 본인이 해온 일들을 후회했다고 한 것이나 다름 없다.”
-만약 당신이 계속 1기 집행부에 남아 있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호성 체제는 막았을 거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안 넘겼다. KBO나 구단이 정말 교활한 것이 뭔지 아나? 막 약을 올린다. 정권도 바뀌는데 돌아가면서 회장을 하라고 한다. 얘네들도 선수인데 왜 너희들만 집행부를 하나, 돌아가면서 해야지, 이런다. 기가 찰 노릇이다. 가뜩이나 집행부를 안 하려는 분위기인데. 사실 막말로 이호성이 회장이라도 상관없다. 선수협 일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되겠나. 열정 있는 사람들이, 목숨 건 사람들이 모였어도 잘 안 되는데 열정도 없는 사람들이 하니 잘 운영되겠나. 그 때부터 선수협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종범은 어떤 인물이었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나. 친(親)선수협이었나.
“철저히 그랬다. 매우 중립을 지켰다. 스타였는데도.”
-양준혁이 왜 선수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아까 말한 선수협 설립목적 등도 있겠지만, 내가 추측해보건대 이렇다. 삼성에서 트레이드된 직후 해태 김응룡 감독이 1년만 뛰고 보내준다고 했는데 진짜 보내줄지 불안해서 그랬거나, 야구를 안하면 안하지 해태에서는 하기 싫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해태로 트레이드된 직후 본인이 직접 은퇴를 말하지 않았나.”
-해태가 선수협 참여를 이유로 양준혁을 내쳤다면 자칫 무적 선수가 될 수도 있었는데.
“양준혁은 선수협이 성공하든 아니든, 그러니까 창립이 되든 안 되든 유니폼을 벗겠다고 했다. 실제 야구 안할 생각을 했을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마음이 변한 거다. 선수협에 참여한 선수들이 트레이드도 되고 했지만 전부 야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랬으면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자기가 선동해서 옷을 벗은 선수들이 수두룩한데 그들의 뒤를 돌아봤어야 했다. 영웅처럼 책을 내지는 말았어야 했다. 구단 타도하겠다고 말하던 사람이 ‘나는 전직 삼성맨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된다.”
-양준혁이 선수협을 버렸다, 뒤로 물러났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간단하다. 해태에서 벗어난 다음부터는 선수협 이야기 자체를 거의 안 했다. 선수협 결성 당시를 빼면 열정적이지도 않았고. 나도 듣는 소리가 있다. 양준혁이 선수협 모임에 잘 나가지도 않고 나와도 말을 잘 안 한다고 들었다. 후배들 입장에서는 ‘저 선배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왜 나서느냐’고 하지 않겠나. 선수협 창시자라면 KBO와 구단의 어느 부분을 공략하고, 우리는 이렇게 와해됐으니 너희들은 그러지 말라고도 해야 한다. 왜 그런 역할을 못해줘, 그 역할을….”
진짜 기가 막힌 게 2009년의 기억이다. 손민한과 권시형이 선수협을 선수 노조로 전환하려고 했다. 실체는 인정 받았는데 대화 자체를 안해주니까 말이다. (KBO나 구단 측은) 만나더라도 다음에 연락을 안했다. 그래서 파업도 할 수 있고 쟁의도 할 수 있는 노조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양준혁은 어땠나. 삼성은 노조에 반대하고 퇴장해버렸다. 선수협 만든 사람이 노조 만든다니까 반대했다. 이게 말이 되나.”
-방송인으로 잘 나갈 때 이야기 안 하고 왜 이제 와서 뒤늦게 양준혁을 비판하는지 의문을 갖는 시각도 많다.
“그게 잘 모르는 분들 논리인데, 내가 왜 양준혁을 비판하나. 선수 시절 양준혁을 비판하나? 야구 잘한 선수를 비판할 부분이 뭐가 있나? 오직 선수협 부분이다. 양준혁을 비판하는 이유는 자신이 선수협을 만들어 놓고도 2001년부터 뒤로 빠져 선수협 자체에 아무 관심을 안 갖는다는데 있다. 선수협이 잘한 일이 있으면 칭찬도 하고, 잘못했으면 혼도 내고 그래야 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다. 양준혁 비판은 선수협 비판으로 확장된다.
선수협에 이호성 체제가 들어서고 나도 선수협을 외면했다. 신경 끄고 살려고 했다. 그러다 선수들이 직접 뽑은 이종범 체제가 들어서자 이종범과 나진균 전 사무총장에게 계속 강한 선수협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집행부의 무능함을 개선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했다. 2007년 권시형 사무총장 임명 시에도 역할을 했다. 하일성 KBO 사무총장과의 만남도 주선하고 KBO가 선수협과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다 최근 선수협 뇌물 횡령사건을 알게 됐다. 지금 선수협을 비판하지 않으면 우리 선수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방송인으로 활동할 때는 누워서 침 뱉는 식이라 선수협을 강하게 비판하지 못했는데 그게 지금 암덩어리를 키운 것 같다. 책임을 통감한다.”
-양준혁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나.
“뒤로 빠져 있지 말고 본인이 만든 선수협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 선수협이 뇌물과 횡령으로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창시자 입장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자기 재단 만들고 야구 해설할 때가 아니다. 꾸준히 선수협에 충고하고 그랬으면, 잡초만 솎아내면 될 일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일을 키웠다. 지금 선수협 꼴이 이 모양인데 무슨 선수협 영웅인가.
양준혁이 내게 할 말 있고 불만이 있으면 직접 따져주길 바란다. 양준혁은 성격이 조용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꽤 수다스럽다. 그런데 선수협 관련 이야기에는 일절 입을 닫고 있다.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하면 되는데 그냥 가만히 있다. 트위터에 몇 줄 쓴 것이 전부다. 자신이 만들자고 주장한 선수협 때문에 수많은 선수들이 유니폼을 벗었고 지금도 힘들게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알면 좋겠다.”
[쿠키 스포츠] 강병규는 자신이 트위터에서 양준혁과 이종범을 비판하는 이유에 대해 선수협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고 했다. 선수협이 희대의 뇌물 스캔들로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지금 선수협을 만들고 지켰던 사람들이 나서 선수협이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가 말한 뇌물 스캔들은 충격 그 자체였다. 1군과 2군 가릴 것 없이 연봉의 1%로 조성된 선수협 예산을 횡령한 증거가 있고, 초상권 독점 계약 문제로 100억원대 비자금을 뇌물로 받은 혐의로 권시형 사무총장이 재판을 받고 있다고 했다.
과거 선수협에 관여한 야구 관계자는 “강병규 말이 모두 사실이다. 강병규가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야구 팬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지만 선수협이 현재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분명하다”고 전했다. 아울러 “강병규가 개인적인 목적으로, 소위 선수협에서 한 자리 하겠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그는 이미지가 좋지 않고 더 잃을 것도 없다. 4년 전부터 계속 선수협이 각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고 덧붙였다.
강병규는 초상권 계약이 정식으로 이사회를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손민한 회장이 권 사무총장 문제로 검찰 참고인 조사까지 받았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선수협 측은 “초상권은 이사회에서 정상적인 의결 절차를 거쳤다”며 손 회장 조사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권 사무총장의 재판 부분에 대해서도 “확인해 줄 것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도대체 선수협이 어떻게 굴러가는데 이처럼 강하게 비판하나.
“우선 이것부터 말하고 싶다. 내가 ‘KBO의 사주를 받았다, 선수협에서 한 자리 하려고 선수협을 비판한다’고들 하는데 정말 인간적인 분노를 느낀다. 제발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선수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팬들이 그걸 허락하겠는가? 돌아가라고 해도 안 간다. 다만 난 선수협 때문에 20년간 손에 잡았던 야구공을 놓았다. 30살에 은퇴했다. 그래서 선수협은 내가 끝까지 지켜야 한다. 내 젊은 날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정말 순수한 의도를 알아주면 좋겠다.”
-선수협 내부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는데.
“한 마디로 썩었다. 유령 단체로 전락했다. 있으나마나한 상황이다. 지금 야구 팬들은 잘 모르고 있다. 기자들이 보도 자체를 안 하니까 말이다. 권시형이 초상권 로비로 인해 수십억원의 뇌물수수 및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손민한이 검찰 참고인 조사까지 받았다. 선수협 사무실이 압수수색 당했고 사무총장이 구속될 뻔 했다. 구속영장만 기각 당했지, 불구속기소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주변 법조인들에게 물어보니 유죄가 유력시된다고 하더라. 선수협이 이 지경이니 최동원 선배나 장효조 선배가 돌아가셨을 때 애도성명 하나 못냈다. 불미스러운 사안에 연루됐으니 손가락질만 받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가.
“YTN 단독보도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선수들의 초상권을 획득하려는 업체가 1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해 브로커를 시켜 준 뇌물을 권시형이 받은 혐의다. 선수협 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도 재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무죄는 재판에서 가려질 사안이다. 다만 정말 지저분하게 엮이고, 또 엮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선수협에게는 치욕스러운 사안이다. 그런데 기자들이 기사를 아예 안 쓴다. 같은 야구 판에서 얼굴을 보고 사는 사이니까 전부 침묵한다. 그러니 야구 팬들이 알 도리가 없다.”
-권시형은 2000년 선수협 결성 당시 산파 역할을 한 중요한 인물이다.
“당시 정말 끈끈한 동지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그러지 않았나 의심이 들 정도다. 어떻게 이런 일에 연루가 될 수 있나.”
-권시형은 나진균 전 사무총장 후임으로 2008년부터 선수협 사무총장을 맡게 된다.
“맞다. 양준혁이 힘을 써준 것으로 알고 있다. 권시형은 선수협 결성 이후 야인으로 살았다. 나쁜 놈으로 몰려서 변변한 일자리도 못 구했다. 정말 가난하게 살았다. 선수협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방송할 때 가끔 애들 학용품도 사주고 그랬다. 술도 사주고. 너무 안타까웠다. 우리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KBO와 구단 측이 양준혁을 비롯해 구단 대표들과 권시형이 물러나야 대화를 해준다고 했다. 한 마디로 무장해제를 요구한 셈이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인 것이다.”
-권시형이 2007년 컴백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나.
“이종범이 선수협 회장 때 기대감이 많았다. 선수들이 직접 뽑은 첫 회장이니까. 그런데 주식 펀드 투자를 했다가 원금이 손실됐다. 2억5000만원 투자했다가 이득도 없이 2년 동안 600만원쯤 손해를 봤다. 그냥 은행에만 넣어 놨어도 몇천만원은 이자다. 당시 나진균 사무총장 시절이다. 권시형과 손민한은 이종범이 회장 그만두는 시점에 나진균을 해임한다. 당시 거의 쫓아내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도덕성을 강조하던 권시형이 지금 훨씬 무거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코미디다.
2007년에 권시형이 날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나진균이 선수협을 망쳤다고 했다. 권시형이 말하기를 나진균이 선수협 예산을 손실했는데 고참 선수들이 연루돼있다고 했다. 공명정대는 사라지고 순수성이 크게 훼손됐다고 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걱정했다. 어떻게 만든 선수협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권시형이 다시 사무총장을 맡고 싶다고 했다. 도와달라고 한 거다. 하지만 내가 선수협 간부도 아니고 뭘 도와주나. 아는 선수들에게 전화해 권시형을 사무총장으로 밀어주라고 말을 해달라는 소리지.
그래서 도와줬다. 하일성 사무총장과 인사도 시켜줬다. 선수협이 권시형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하면 KBO가 반대성명을 내지 말라고 조언도 해줬다. 싸울 건 싸우고 협의할 건 협의해서 성실히 서로 대화하라고 했다. 모두 좋다고 하더라.”
-그렇게만 됐다면 선수협은 아주 잘 성장했겠다.
“나진균 해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선수협 긴급 이사회가 리베라호텔에서 열려 나진균에게 만나자고 했다. 30분 만에 오더라. 내가 권시형에게 나와 나진균하고 삼자대면 하자고 했다. 그런데 권시형은 뒷문으로 몰래 나갔다. 나진균이 잘못했으면 셋이 따지면 될 일인데 그냥 가더라. 그때 나진균 말을 믿게 됐다. 나진균의 잘못도 있기는 하지만 권시형이 사무총장을 하고 싶어서 작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진균은 부당해고를 이유로 잔여 연봉과 퇴직금을 돌려달라고 선수협과 소송 중이다.
그때 정말 웃겼던 것이 내가 권시형을 만나러 이사회 장소에 들어가려고 하니 선수협 직원이 나를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쳤더니 선수협 직원이 날 경찰에 신고하더라. 경찰이 날 보더니 쓴 웃음을 지으며 돌아갔다. 죽을 만큼 창피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지만 11년 전 선수협을 만든 날 이사회도 못 들어오게 하다니 말이 되나. 너무 슬픈 현실이다.”
-선수협 뇌물 스캔들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그건 재판 과정에서 밝혀질 사안이다. 뇌물과 횡령 혐의다. 사건에 연루된 것만으로도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 적어도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지저분하다. 브로커가 등장하고 쉘 컴퍼니, 비자금, 은퇴선수 이름이 나온다. 뇌물 스캔들이자, 비리 커넥션을 의심 받고 있는 상황이다.”
-선수협 회장인 손민한도 알고 있나
“당연하다.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고 알고 있다.”
-손민한의 책임도 있다고 보나.
“난 10년 전 양준혁 보다 현재 손민한이 더 나쁘다고 본다. 선수협 회장 아닌가. 잘 들어보라. 이건 형사사건이다. 무슨 민사사건도 아니다. 검찰이 중대한 범죄행위가 발생했다고 봐서 기소해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 회장으로서 직무유기다. 문제를 알았다고 해도 문제고, 몰랐다고 해도 문제다. 그가 최종적으로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뇌물과 횡령, 이 단어가 선수협에서 어디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가. 야구 팬들에게 존경 받는 선수들이 상당수 연루되어 있다. 대형 포털 사이트가 개발한 유명 게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안이다.”
-초상권은 선수협 같이 영세한 조직에게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인데.
“2007년까지 선수협은 초상권 자체가 없었다. KBO가 갖고 있었다. 초상권 수익의 일부만 선수협에 주고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우리 선수들 이름이고 얼굴인데. 그러다 선수협이 2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초상권을 가져왔다. 2009년이다. 초상권 같은 것은 특정 업체의 로비로 넘겨서는 안 되는 선수들의 소중한 권리다. 비자금 같은 것에 연루될 게 아니라 당당하게 선수협 기금으로 받던가, 공개 입찰을 했다면 문제 소지가 없었다. 투명하게 처리했으면 선수협이 아주 큰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유명 야구기자 한 명이 초상권을 갖고 선수협과 브로커를 연결시켰다. 2009년 선수들이 해외 전지훈련 갔을 때 초상권 계약을 했다는데 이사회 의결을 거쳤는지조차 의문이다. 이사회 회의록도 없고 대표 선수들 만나보니 대충 얘기만 들은 정도라고 한다. 기가 막히다. 구멍가게 만도 못한 시스템과 외부 감사조차 받지 않는 선수협. 연루된 인사가 한두 명이 아니다. 반드시 모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손민한이 이사회를 소집해 권시형을 해임시킬 법도 한데.
“믿는다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는데 손민한은 여전히 권시형을 신뢰한다고 말한다.”
-손민한과 연락을 취한 적 있나.
“있다. 처음에 권시형을 믿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모른다고만 둘러대더니 계속 물어보니 나중에는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권시형을 그대로 둘 거냐고 하니 언론에 나오고 하면 해임 절차 밟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기다렸다.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고 검찰 조사를 지켜본다고 하더라. 또 기다렸다. 그러자 검찰 조사가 끝나 재판까지 받고 있는데 이제는 재판이 끝나봐야 한다고 했다. 기가 찬다. 증인 때문에 재판이 길어지는 것이고 불구속 상태라고 해도 검찰이 혐의가 있다고 판단해 기소했는데 아직도 사무총장이다. 야구 선수들은 법을 잘 모른다. 그냥 밖에 돌아다니면서 ‘내가 죄 있으면 여기서 너희들하고 회의를 하겠느냐’고 하면 그냥 믿는다.”
-선수협은 재판 신경 쓰느라 바쁘겠다.
“요즘 활동 하는 거 있나? 없다. 있어도 의미 있는 결과물이 아니다. 올해 포스트시즌 되면 4강 탈락한 팀 선수들이 겨울 훈련을 간다. 총회 다운 총회를 또 못한다. 뿔뿔이 흩어진다. 현 집행부가 바라는 상황이다. 모이면 좋은 소리 안 나오니까. 올 시즌 끝나고 롯데가 손민한과 재계약을 안하면 선수협 정관을 개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 현역 선수 아니더라도 회장을 할 수 있도록 하거나 그런 식으로…. 난 손민한이 권시형 보다 더 나쁘다고 본다. 어떻게 다 알면서도 권시형을 믿는다고 할 수 있나.”
-선수협 조직이 기형적으로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선수협 예산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아는가? 2000년 만들어질 때 선수 연봉의 1%를 내도록 했다. 2군 선수도 낸다. 1만원, 2만원 이렇게 조금씩 모아서 운영된다. 이런 피 같은 돈을 횡령하면 정말 나쁜 놈이다. 선수 권익을 보호하겠다고 만든 선수협이, 그 사무총장 자리가 연봉이 7000만원이다. 상여금까지 포함하면 연봉이 1억원을 넘는다. 유류비, 법인카드 다 나온다. 무슨 대기업이다. 이게 말이 되나. 사무총장만 그런게 아니다. 국장, 과장, 직원들 모두 연봉이 높다. 이게 말이 되나. 무보수 명예직은 못할 망정 2군 선수들은 돈이 없어서 좋은 배트, 글러브 하나 못 사는데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선수협 처음 만들었을 때도 그렇게 고액 연봉이었나.
“나 참.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면 빌렸지, 받긴 뭘 받나. 선수협 통장에 돈만 채우기 바빴다. 그때 도와준 사람들, 선수협 응원한다고 1000원 2000원씩 보내준 야구 팬들이 있다. 명부가 다 있다. 그 분들에게 ‘저희가 정말 어려웠는데 이제 조금 먹고 삽니다’라고 하면서 야구공 하나라도 보내줄 생각을 해야 한다. 물론 보내드려도 안 받을 것이다. 야구 팬들이 괜찮다고 할 것이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지. 선수협을 도와준 팬들을 찾아가는 노력을 해야지. 아저씨들 힘내라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동전을 주던 꼬마 팬들도 있었다. 이번 사안에 연루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용서가 안 된다.”
-내부 비판 세력은 없나.
“선수협 결성 당시 멤버들을 봐라. 양준혁 해설하지, 송진우 코치하지, 박정태 2군 감독하지, 마해영은 선수협 산하 은퇴선수협 사무총장이지, 뭐 이렇다. 야구 판에서 얼굴 안 붉히려고 전부 가만히 있다. 전부 입 닫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죽어주길 바랄 것이다. 시끄러워지니까. 양준혁에게 선수협에 대해 지지하든 비판하든 무슨 말이라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인이 만든 조직이 이런 추악한 스캔들에 휘말렸는데 가만히 있다는 것이 말이 되나.”
-현재 구단 대표 선수들은 어떤가. 모두 침묵하나.
“비참한 부분이다. 몇 명 빼고는 전혀 비판하지 않는다. 몇 명만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다. 현 구단 대표들이 뭘 알겠나. 선수협 태동 목적도 잘 모르는데. 지금 선수협은 유령단체다. 야구 팬들에게 감히 묻겠다. 선수협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아시는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안 한다. 유령단체로 전락했다.”
-대체 선수협이 얼마나 망가진 것인가.
“선수 권익 보호하자고 만든 단체인데 연봉 꼬박꼬박 받아가면서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 힘겹게 사는 은퇴 선수들 정말 많다. 초상권료가 힘이 될 수 있다. 그것 좀 게임업체에게 받아달라고 하는데 ‘네가 직접 받아라’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게 동료들인가. 딱 한 마디로 정리하겠다. 2000년 선수협은 시민들에게 ‘제발 우리를 알아주세요’라고 빌었다. 하지만 지금 선수협은 ‘제발 우리를 몰라주세요. 관심 좀 꺼주세요’라고 하고 있는 꼴이다.”
[쿠키 스포츠] 강병규는 2000년 선수협 문제로 두산 베어스 보호선수에서 제외된 후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이후 한 시즌 만에 은퇴한다. 바로 한해 전 개인 최고 성적을 거뒀지만 30살에 유니폼을 벗는다. 그는 선수협 탈퇴를 조건으로 SK 구단에게 각서를 종용받고, 선수협 결성 동지들이 “구단과 잘 좀 지내보지 그랬느냐”라는 말에 미련없이 야구를 그만 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아직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했다.
-평범한 수준의 선발투수였지만 1999년 두산의 무너진 선발진의 희망으로 떠올라 13승9패를 거뒀다. 평균자책점은 5.21이었지만 당시는 지독한 타고투저 시즌이었다. 그리고 SK로 옮긴다.
“최고 성적이기는 한데. 야구는 잘 못했다. 평범했다. 2000년 3월초로 기억한다. SK가 쌍방울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재창단했는데 각 팀에서 보호선수를 제외하고 1명씩 주기로 했다. 그런데 권시형이 내가 두산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고 하면서 SK 사장을 만나보라고 하더라. 선수협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두산 쪽에서 아무런 이야기가 없던 상황이라 ‘형이 어떻게 알아?’ 그랬더니 SK 쪽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 같다더라. 사장단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겠지.
SK 안용태 사장을 만났다. 안 사장이 권시형에게 그랬단다. 강병규가 두산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는데 어디 몸이 아픈 거냐고, 운동 못하는 상황이냐고. 권시형이 전혀 아니라고. 13승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직접 만나보라고 한 모양이다. 안 사장과 만나니 SK는 돈도 많고 지원도 잘해주겠다고 하더라. 무엇보다 선수협을 적극 지지한다고 말했다. 잘못된 제도가 많으니 두산에서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면 SK를 와 달라고 하더라. 연봉은 2억을 준다고 했다. 연봉도 마음에 들었지만 선수협을 지지한다는 말이 너무 고마웠다. 두산에서 버린 날 데리고 가려는 SK에 대한 호감도 있었다.”
-그런데 결국 그게 마지막 프로시즌이었다. 2000년 방출됐다.
“연봉 2억원을 준다고 하더니 1억원에 옵션 계약을 맺자고 하더라. 나는 난리를 쳤다. 당시 구단 사장이면 곧 법이다. 사장이 한 말을 지켜달라고 했다. 그런데 뭐라는지 아나? 당시 SK가 프로야구 판에 처음 들어와서 연봉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한 소리였다는 거다. 기가 막혔다. SK가 이동통신사니까 CF로 연봉을 보전해준다고 하더라. 불합리한 연봉계약 구조 때문에 선수협도 만들었던 나다. 하지만 그냥 사인했다. 화가 나지만 그냥 사인했다. 왜인지 아나?”
-그게 궁금하다. 곧 바로 유니폼을 벗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선수협 대변인으로 연봉계약 갖고 나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선수협 이미지가 나빠지니까. 다른 가난한 2군 선수들도 있고 한데 이런 일로 또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계약했다. 안 사장이 1군 복귀하려면 빨리 몸을 만들어야 한다며 어떤 지원을 바라는지 물었다. 그래서 ‘투수들은 더운 곳에서 훈련하면 1달 걸릴 거 보름이면 몸을 만들 수 있다. 전지훈련을 못 갔으니 더운 곳에서 재활을 좀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나.
“안 사장이 알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강병철 감독과 코치들이 선수협 대변인이면 대변인이지, 특별대우해주지 말라고 했다더라. 기가 막혔다. 내가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니다. 구단이 몸 빨리 만들라고 도와주겠다고 해서 재활에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했더니 이렇게 나온 거다. 그렇게 그냥 인천에서 몸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가깝기는 하지만 객지 생활이라 많이 힘들었다.”
-성적이 고작 2승에 그쳤다. 억대 연봉 받는 선수 치고는 초라한 성적이다.
“할 말이 없다. 컨디션이 형편 없었다. 하지만 정말 억울한 부분이 있다. 내가 선수협 대변인으로 특별대우를 요청했다, 등판 거부를 했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었다는 등의 소문이다.”
-햇빛 알레르기라는 소문도 있었나.
“구단 트레이너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강 감독이 무조건 운동장에 나오라고 했다고 하더라. 시즌 중 강 감독을 찾아갔다. 지금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으니 제발 몸을 만들 시간을 달라고 했다. 어디 부러진 곳은 없으니 치료와 재활을 병행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진단서를 떼어 오라고 했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아예 내 말을 거짓말로 알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일반 병원 두 곳을 갔다. 한 곳에서는 지금 컨디션 자체가 최악이라고 했고, 한 곳에서는 열꽃과 반점이 심하니 무조건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그런데 구단에서는 후자만 언급하며 ‘야구 선수가 피부 좀 안 좋다고 훈련을 못하겠다고 한다. 저 자식이 저런 놈’이라고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냥 어깨가 아프다고 할 걸 그랬나 싶었다. 한마디로 SK 1년은 악몽이다.”
-만약 당시 겨울에 선수협 활동을 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몸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리 뛰어난 투수가 아니었다. SK는 신생 팀이라 전력 자체도 약했고. 타선 지원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다만 정상적으로 전지훈련 가고 했다면 시즌 로테이션 한 축 정도는 맡지 않았겠나.”
-결국 시즌 후 방출된다. 당시 30살이었다.
“안 사장과 8월에 다시 만났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앞으로 선수협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라고 했다. 너무 화가 나서 심하게 따졌다. 선수협을 적극 지지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냐고. 안 사장은 그럼 너 때문에 내가 맨날 KBO 이사회 나가서 스트레스 받아야겠느냐고 했다. 다른 구단 사장들이 강병규 하나 못 자르냐고 놀리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선수협의 ‘선’자만 꺼내도 넌 자를 거라면서 각서를 쓰라고 종용했다. 자기가 다른 구단 사장들에게 ‘강병규, 선수협 못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왔다고 했다. 나한테 묻지도 않고 이상한 약속을 하고 온 거다.
선수협과 야구 중 선택하라고 하더라. 테이블 치고, 악쓰고 별 짓을 다했다. 절대 각서 못 쓴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구단 운영팀에서 연락 와서 유니폼 반납하라고 했다. 눈물이 났다. 10살 때 야구공을 잡은 뒤 20년 만에 야구를 그만 둔다고 생각하니 정말 너무 슬펐다. 그래도 선수협을 포기하라는 각서는 쓸 수 없었다. 그래도 안 사장이 고마운 부분은 날 방출시키는 이유를 설명해줬다는 점이다. 그냥 방출했으면 2승 밖에 못 거둬서 날 잘랐나, 무슨 꿍꿍이가 있나 생각했겠지만 선수협 때문이라고 정확히 알려줬다.”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나.
“아무 말씀 없으셨다. 나도 신문 보고 내가 방출된 걸 알았는데. 부모님도 뉴스 보고 아셨다. 그냥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네가 원해서 야구했고, 네가 다 잘해서 프로 갔으니 알아서 잘하라고 하셨다.”
-선수협을 함께 결성한 양준혁이나 송진우, 권시형은 아무 말 없었나.
“곧바로 전화가 왔다. 지켜주겠다고. 야구 꼭 다시 해야 하니 몸 관리 잘하고 있으라고.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믿었다. 겨울에 함께 그 고생을 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선수협 총회한다고 해서 나갔더니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저 사람이 날 진심으로 걱정하는지 아닌지 그게 보이더라. 양준혁은 ‘구단하고 잘 좀 지내지 그랬냐’라고 했다. 구단하고 끝까지 싸우자던 사람이 그랬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 이후로 만나지 않았다.”
-다른 팀의 영입 제안도 없었나.
“없었다. 언론에서 강병규 죽이기 담합이 8개 구단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기사를 쓸 정도였다. 날 좋게 봐주시던 모 구단 단장이 한 번 전화로 몸 잘 만들고 있으라고 말을 건넸지만 이후 전화가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스포츠서울 이종남 국장이라고 정말 유명한 야구 기자가 계셨는데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야구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기사도 써주시고 했는데 나중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8개 구단 모두 영입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강 선수가 싸움에서 진 것 같다고 했다. 뭐 각오하고 있었다. 애써 주신 분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나이 서른에 그렇게 야구를 그만두니 막막했겠다.
“막막하기도 했지만 뭐 자신감은 있었다. 선수협 만든 것 후회하지 않았고. 뭐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각오는 했지만 현실로 닥치니 혼란스럽기는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당당히 살자고 다짐했다. 그러다가 KBS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김시규 CP에게 전화가 왔다. ‘출발 드림팀’ 때 알게 된 분이다. 야구 정말 안 하느냐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게 됐다고 했더니 선수 시절 받는 연봉에는 안 되지만 한 번 방송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강호동, 그룹 핑클과 함께 99초 안에 광고 찍는 코너로 데뷔했다. 그것도 3개월 시한부였다. 여론이 안 좋아도 3개월은 진행하겠지만 계속 심해지면 3개월만 하고 그만 둘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면 된다.”
-두산 팬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지 않았나. 우승도 경험하고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맞다. 당시 팬들이 두산에서 날 버린다고 시위도 벌여주고 했다. 고마운 분들이다. 아직도 OB의 등번호 1번, 두산의 등번호 1번 수식어가 제일 좋다. 방송도 하고 했지만 야구할 때가 제일 좋았다.”
-어떤 야구선수로 남고 싶었나. 지금이라도 당시 두산 투수 강병규 팬들에게 할 말이 있나.
“고맙고 미안하다. 정말 너무 감사했다. 그리 뛰어난 투수도 아니었는데 너무나 많은 박수를 받았다. 두산은 전통적인 강팀이고 팀 컬러가 끈끈하니 팬들도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다. 야구인 이미지가 아직 남아있다면 두 가지만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 난 현역 시절 최고 구속이 140㎞ 초반이었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140㎞를 던질 때 160㎞를 던진다고 최면을 걸면서 던졌다. 그래야 타자를 이길 수 있다. 잘은 못했는데 자신감은 있던 투수로, 또 성남고 고3 시절 6연속 완투를 했었는데 패기 있던 선수로 기억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
[쿠키 연예] 강병규는 2009년 상습도박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 받는다. 야구인 얼굴에 먹칠 했다는 세간의 비판이 쏟아져 당시 진행하던 지상파 MC 자리에서 모두 하차했다.
여기에 배우 이병헌의 전 여자친구를 둘러싼 공방, KBS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폭행 논란도 이어졌다. 잘 나가던 방송인의 이미지는 사라졌고 한동안 두문불출한 채 종적을 감췄다.
-방송인으로 상당히 잘 나갔다. 외모와 언변을 동시에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모는 아니고. 그냥 중학교 때인가 하루는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오라고 했다. 야구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수업도 들어오라고 해서 짜증이 났는데, ‘나중에 자식이 아빠는 알파벳도 모르느냐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다. 그 이후로는 피곤해도 수업에 가급적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야구부가 아닌 다른 또래 학생들하고도 어울려 활발하게 지내고.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가장 잘 나갔을 때 회당 출연료가 얼마나 됐나.
“회당 1000만원 내외 수준이었다. 당시가 2000년대 중반이니까 상당히 대우가 좋았고 보통 연예인들은 행사 같은 걸 많이 하는데 그 수입이 엄청났다. 뭐 노력에 비해 운이 좋았던 결과다.”
-방송인으로 전성기를 달리다가 결국 상습 도박 사건에 연루된다. 야구인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세간의 혹독한 비판이 쏟아졌다.
“할 말이 없다. 그 때 수중에 돈이 많아서 눈에 뭐가 씌워졌었던 것 같다. 사람도 잘못 사귄 것 같고. 부모님은 어릴 적 야구할 때부터 두 가지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담배와 도박. 그런데 그 약속을 어겼다. 드릴 말씀이 없다. 이건 내가 법적 처벌을 받은 것을 떠나서 두고두고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지금도 죄송할 따름이다.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다.”
-2008 베이징올림픽 연예인 응원단을 조직해서 혈세 논란이 불거졌을 때 사건이 일어나 결국 방송 활동을 하차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행사를 주관하는 여행사가 잘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지 사정이 정말 열악했다. 문광부가 말한 약속도 중국 현장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혈세를 낭비했다고 하는데 세금은 아니었고 장관이 1년에 임의로 사업성을 보고 사용하는 금액 중 일부였다. 오해도 많고 부풀려진 측면이 있지만 당시 내 뜻에 동의해준 연예인들과 팬들에게 미안하다.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라고 해도 좀 더 세세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구설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배우 이병헌의 전 여자친구 사건과 KBS 드라마 ‘아이리스’ 폭행 논란에도 휘말렸다.
“그건 길게 말하지 않겠다. 무죄를 확신한다. 나중에 재판 결과를 지켜봐 달라. 이병헌과 정태원은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기 혐의로도 피소됐는데.
“우선 돈을 빌렸는데 갚지 못했다. 그건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채무 변제 의무를 인지했고 빚 갚을 의사가 분명히 있었다. 마치 돈을 일부러 갚지 않으려고 했던 것으로 몰아가는데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자꾸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니까 빚을 빨리 받아내려고 고소를 하면 돈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도 어음, 차용증으로 받을 돈이 20억 가량 된다. 정말 갚을 의지가 있다.”
-구설수와 사건이 계속 터지니 당신 말을 믿어주는 대중이 그리 많지는 않다.
“안다. 모두 내 탓이다. 재판 4건을 진행하고 있다. 금방 결론이 날 재판들도 아니다. 가끔 아침에 눈을 뜨면 계속 새벽이 이어지길 바라고 했었다. 무슨 전쟁이라도 나서 전부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었다.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난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다. 절대 가족을 두고는 못 죽겠다. 아무리 빠져 나오려고 해도 늪에 갇혔으니까. 나도 어떤 때는 내가 싫다. 내 이 성격이 너무 싫다. 하지만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트위터에 '강병규 자살해라'라고 멘션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딛고 일어서야 지금까지 믿어준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트위터를 통해 노이즈 마케팅을 펼쳐 종합편성채널로 복귀를 꿈꾼다는 시각이 있다.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내가 방송 복귀를 꿈꿀 수 있겠는가. 방송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전혀 제의를 받은 바 없고 지금 방송을 할 생각 자체가 없다. 선수협과 내가 받고 있는 재판들이 먼저다.”
-최근 야구계 큰 별들이 떨어졌다. 빈소에는 다녀왔나.
“무슨 얼굴로 그 선배들을 뵙겠나. 내가 가면 또 시끄러워 질 것 같아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
읽어보면 강병규씨의 말이 틀리지만은 않다는 말을 알 수 있습니다. 야구 팬이라면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포스트를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