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니키 버트의 폼이 팀 경기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對 에버튼전에서는 버트의 무리한 태클로 페널티를 내주어 결과론적이지만 2:1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경기를 무승부로 만족해야 했고 어제 對 선더랜드전에서는 무승부로 갈 수 있었던 경기를 패배로 이끌었습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1980년 이후로 첫 패배였습니다. 어수선한 구단 상황과 감독 교체 등으로 인해 팀 전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걸 감안한다 하여도 버트의 실수들은 눈 감아 줄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승점 한점한점이 필요한 때인만큼 더욱 조명받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버트의 하락세 이유는 단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체.력.저.하. 최근 경기를 보면 버트가 상대 공격수를 체력적으로 따라가지 못해 태클로 막으려 하다가 파울로 이어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파울들이 페널티와 프리킥으로 돌아오고 결국 패배로 이어졌죠. 게다가 요즘은 중구난방으로 의미없는 롱패스를 뿌리는데 좋게 말해서 4차원 패스지 팀의 공격흐름을 끊어먹는 플레이입니다. 잠깐.. 파울로 팀을 무너뜨리며 롱패스를 뿌리는 선수. 누군가 생각나지 않나요? 버트는 어느새 미드필드의 브램블이 되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버밍엄으로 임대를 갈 정도로 그다지 큰 기대를 받지 못했던 버트였지만 로더 지휘하의 06/07시즌 뉴캐슬에서 맹활약을 보이며 주전자리를 꿰찼습니다. 그 이후 회춘이라도 한듯이 주전자리를 꿰차고 활약을 계속해 나갑니다. 06/07시즌 31경기 출장, 07/08시즌 35경기 출장, 그리고 08/09 시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체력적 부담이 커지는 나이임에도 매시즌 거의 전경기에 출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선수라고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쇠하기 나름입니다. 빠른 75년생인 버트의 전 소속팀 맨유의 비슷한 나이대 선수들을 뽑아보면 긱스 (73년생), 스콜스 (74년생), 네빌 (빠른 75년생)입니다. 맨유에는 이들이 전경기를 소화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이들의 대체자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어떨까요. 버트의 대체자라고 할만한 수비형 미드필더가 있기는 할까요? 바튼은 자기 앞나름하기도 바쁠 뿐더러 바튼의 공격능력은 수비로 돌리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에드가는 이미 미드필더보다는 수비요원으로 돌아선 것 같구요. 이미 몇 시즌전부터 예고되어온 버트의 노쇠화를 못 본척 해온 것에 대한 마땅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최우선 타겟은 버트의 대체자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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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2월 16일에 태어난 지미 로렌스(James "Jimmy" Lawrence)는 뉴캐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라고 가히 말할 수 있습니다. 기복이 없기로 유명했던 로렌스는 무려 14 시즌 동안 뉴캐슬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총 496 경기에 출장하며 최다경기출장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출신이었던 그는 팔틱 아슬레틱에서 데뷔하여 글래스고 퍼스샤이어로 이적했습니다. 여기서 재밌는건 글래스고 퍼스샤이어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에딘버그의 주전골키퍼인 해리 레니가 부상일 경우 간간히 에딘버그에서도 뛰곤 했다는 것입니다. 동네축구도 아니고 프로축구에서 이러한 일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190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에는 가능했나 봅니다.


뉴캐슬의 비공식 첫 감독이자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던 프랭크 와트는 자신의 출신을 이용해 스코틀랜드 출신의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여 팀의 전력을 향상시키고 있었고 지미 로렌스는 그러한 케이스 중 하나였습니다. 1904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영입된 로렌스는 1부리그 3회 우승(1905, 1907, 1909)과 1번의 FA컵 우승(1910)으로 뉴캐슬의 토대를 쌓은 전설의 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한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면 이러한 맹활약을 펼친 로렌스가 정작 스코틀랜드 국가대표에는 단 한번 밖에 출장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922년 뉴캐슬에서 마지막 경기인 496번째 경기에 출장하던 로렌스의 당시 나이는 37세였습니다.


당시 경기 프로그램. 눈 크게 뜨고 보면 맨 아래 Lawrence라고 써 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행정 쪽에도 자질이 있었던 로렌스는 프로축구선수조합(PFA)의 전신인 프로축구선수조합연맹(AFPU)의 의장이기도 하였으며 은퇴 후에는 감독이 되어 사우스쉴즈, 프레스턴, 릴리화이츠, 카를스루에 등의 팀을 이끌었습니다. 로렌스는 1933년, 스코틀랜드의 스트란라에 F.C의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년뒤인 1934년 11월, 업무 중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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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로렌스 (James "Jimmy" Lawrence)

출생 : 1885. 02. 16. 글래스고

포지션 : 골키퍼

클럽경력 :
팔틱 애슬레틱
글래스고 퍼스샤이어
1904-1922 뉴캐슬 496

감독경력 :
사우스쉴즈
프레스턴
릴리화이츠
카를스루에

구단주경력 :
스트란라에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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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열릴 베이징 올림픽의 축구 공인구가 공개 되었습니다. 축구종목의 공인구는 간단히 말해서 그 대회에서 사용하는 축구공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공인구는 피버노바였고 2006년 독일 월드컵의 공인구는 팀 가이스트였습니다. 공인구들은 멋진 디자인뿐만이 아니라 최첨단 제작기술들을 사용하여 만들어지므로 공인구를 기다리는건 축구팬들에게는 또하나의 재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버노바는 이렇게 생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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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가이스트는 이렇게 생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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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때마다 획기적인 인기를 끌며 축구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공들입니다.

이제 베이징 올림픽 공인구인 '팀가이스트II 마그누스 모에니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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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디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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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디자인을 만들었는지 그 무모함에 박수 칠 수 밖에 없네요. 빨강색 디자인은 둘째치고 '中國'은 왜 박았답니까? 전세계 선수들이 수천번은 발로 찰 공에 그렇게까지 국가명을 박고 싶었던 걸까요. 자기네 나라 이름이 하루에도 수백번은 발로 차이는걸 바랐던걸지도 모르겠네요. 하여튼, 중국 디자인 대단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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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4월 20일, 노스타인사이드의 퍼시레인에서 태어나 1963년에 죽은 프란시스 허즈페스(Francis Hudspeth)뉴캐슬 역사상 2번째로 많은 출장을 한 선수입니다. 허즈페스는 뉴캐슬에서 1910년부터 1929년까지 무려 19번의 시즌을 지냈습니다. 수비수로 왼쪽 풀백을 도맡았던 허즈페스는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안정적인 수비로 팬들에게 'Old Surefoot'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허즈페스는 주장이었고 휴이 갤러쳐가 영입된 이후로는 부주장을 맡았습니다. 또한, 허즈페스는 페널티킥에 통달하였으며 그가 뉴캐슬에서 기록한 37골 중 25골은 페널티킥으로 기록한 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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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출장한 적이 있는 허즈페스는 472번의 출장으로 팀 역사상 2번째 최다 출장자입니다. 참고로 뉴캐슬 최다 출장 선수는 지미 로렌스로 496번 출장했습니다. 현역이자 뉴캐슬의 주전 골키퍼인 셰이 기븐(현재 439번출장)이 마의 숫자 500 출장을 깨주길 기대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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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영국에서 제작된 트레이딩 축구 카드 中 '뉴캐슬의 주장' 허즈페스

프랜시스 허즈페스 (Francis Hudspeth)

출생 : 1890. 04. 20. 노스타인사이드

포지션 : 풀백

: 170cm

클럽 경력 :
1910-1929 뉴캐슬 472 (37)

국가대표 경력 :
1925 잉글랜드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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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화이트(Len White)는 동시대의 선수였던 재키 밀번의 명성에 가려 그다지 알려져 있지만 그의 업적은 위대합니다. 화이트는 앨런 시어러, 재키 밀번에 이어 팀의 역대 3번째 최다 골 기록자이며 그가 밀번과 함께 이루었던 투톱진은 50년대 유럽의 최강이었다고 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어러와 밀번의 평균 한 경기당 득점이 각각 0.509, 0.504인 것에 비해 화이트의 한 경기당 득점은 0.569이었던 것을 보면, 렌 화이트의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이유는 단지 재키 밀번과 동시대의 선수였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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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캐스터 근처의 작은 마을인 스켈로우에서 태어난 화이트는 로테르담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화이트는 로테르담에서의 3년 동안 매해 뉴캐슬의 FA컵 연승행진을 끊어버리며 뉴캐슬 팬들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953년, 뉴캐슬은 렌 화이트를 £12,000의 이적액으로 영입합니다. 바바야로도 £1m를 받은 지금의 입장에서  £12,000는 코웃음만 나오는 액수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습니다. 뉴캐슬에서 초반에는 윙어로 뛰었던 화이트이지만 곧 재키 밀번과 함께 투톱진을 이루었으며 이 둘의 무적 투톱은 1950년대를 군림했습니다. 화이트는 놀라운 골기록들을 꾸준히 이어갔으며 1955년 뉴캐슬의 FA컵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1957년 밀번이 뉴캐슬을 떠나자 화이트는 뉴캐슬 전설들의 셔츠라 할 수 있는 9번을 이어받았으며 1962년에 허더스필드로 떠날 때까지 끊임없는 골 기록을 보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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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슬을 떠난 후 4년동안 허더스필드와 스톡포트에서 뛴 후 은퇴한 화이트는 1994년 6월 17일, 허더스필드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52년부터 1962년까지 뉴캐슬에서 활약했었던 렌 화이트는 269경기 동안 153골을 기록하며 시어러의 206골, 밀번의 200골에 이어 팀의 3번째 최다 골 기록자입니다. 하지만 재키 밀번과 동시대의 선수이어서인지 그의 명성은 다소 가려져있지 않나 싶습니다. 렌 화이트가 삼국지를 알았을리는 없지만 삼국지 주유의 명대사인 '하늘은 주유를 낳으셨으면서 어찌하여 제갈량도 낳으셨습니까?'와 가장 어울리는 뉴캐슬 레전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렌 화이트와 재키 밀번의 화려한 투톱 연계를 본 당시 툰 아미들은 '하늘은 렌 화이트를 낳으셨으면서 어찌하여 재키 밀번도 낳으셨습니까? 너무 감사하지 말입니다!'라며 행복했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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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화이트 (Len White)

출생
: 1930. 03. 23. 스켈로우

사망
: 1994. 06. 17.

포지션
: 포워드

클럽경력
:
1950-1952 로테르담 43 (15)
1952-1962 뉴캐슬 245 (142)
1962-1964 허더스필드 102 (37)
1964-1966 스톡포트  4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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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바요르 : 라이더킥!!!!!!!!! 죽어라!!

..공이 저 아래 있는거 보면 이건 다소 의도적이 아니었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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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바요르 : 달려라! 이히힝!

..경기 도중 말타는 아델바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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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 : 나를 찬양하라!!
나니 : ...넵!

...왠지 사이비 교주 분위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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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생인 ‘수퍼맥’ 말콤 맥도날드('Supermac' Malcolm Ian Macdonald)는 자신의 고향 팀인 풀햄을 응원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유소년 팀들을 돌아다니며 실력을 키우던 맥도날드는 훗날 자신의 축구인생을 성공가도로 이끌어줄 해리 해슬람을 만납니다. 1967년 해슬람의 초대로 톤브릿지와 계약한 맥도날드는 해슬람이 2년뒤 풀햄으로 떠나자 해슬람를 따라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 팀인 풀햄으로 이적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적한 첫시즌, 풀햄은 강등되었고 왼쪽 풀백으로 뛰던 맥도날드는 경기에 많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1969년 7월, 풀햄은 £17,500의 이적금으로 맥도날드를 루턴에 이적시킵니다. 루턴에서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한 맥도날드는 풀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겠지만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화려한 모습, 과도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자신감 등을 기반으로 점점 성장했습니다. 맥도날드는 수비수들을 빠른 속도로 따돌리고 강력한 슈팅을 날리며 수많은 멋진 골들을 넣었고 루턴은 맥도날드의 대활약을 기반으로 3부리그로 승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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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리그에서 27골을 넣었던 맥도날드는 2부리그에서 30골을 넣으며 더욱 활약하였고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었던 조 하비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합니다. 조 하비 감독은 당시 영국 역사상 2번째 최고 이적금이었던 £180,000을 쓰며 1971년, 말콤 맥도날드를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데려왔습니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쇼비지니스가 무엇인지 아는 선수였던 맥도날드는 자신의 기자회견에 기사가 운전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당시 비평가들은 맥도날드를 '1부리그 수준이 아니다', '너무 왼쪽에 치우친 플레이를 보인다'라며 저평가 했습니다만 맥도날드는 곧바로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자신의 데뷔 경기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맥도날드는 뉴캐슬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데뷔하자마자 뉴캐슬 서포터들의 지지를 얻어낸 맥도날드는 70년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였습니다. 비싼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을 자주 방문하여 샴페인을 마시며 커다란 시가를 피우곤 했던 맥도날드는 자신만의 부티크를 소유했고 늘 깔끔한 차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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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의 골에 이은 골들은 서포터들을 흥분시켰고 맥도날드는 5년 연속 클럽의 최다 득점자가 되며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뉴캐슬에서 뛰면서 웨일즈를 상대로 잉글랜드 국가대표 데뷔를 치른 맥도날드는 1975년 4월 16일, 대기록을 세웁니다. 잉글랜드가 사이프러스를 상대로 5:0 대승하였을 때 5골을 전부 넣으며 잉글랜드 한경기 일인 최다 득점기록과 타이를 이룹니다. 이 기록은 현재에도 유효하며 당시 신문의 1면을 ‘수퍼맥 5 : 사이프러스 0’이라고 장식했습니다. 맥도날드는 A매치에 총 14번 출장하여 6골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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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과 1976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FA컵 결승전으로 이끌었던 맥도날드였지만 뉴캐슬에서 그의 생활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고든 리가 임명되기 전까지 난 뉴캐슬을 사랑했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맥도날드는 당시 감독인 고든 리와 갈등을 맺었습니다. 결국 1976/1977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고든 리 감독은 ‘수퍼맥’을 아스날으로 이적시켰습니다. 이 이적은 약간 특이했었는데요. 맥도날드의 이적금은 £333,333.33이었으며 ‘수퍼맥’은 뉴캐슬을 떠날 때 그가 롤스로이스를 타고 뉴캐슬에 도착했던 것처럼 럭셔리하게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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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에게 맥도날드를 판 고든 리의 결정은 뉴캐슬 서포터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아직까지도 논란거리로 남아있습니다. 고든의 통계는 그가 2경기에 1골씩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클럽이 이러한 선수를 다시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이버리에서도 맥도날드는 2시즌 연속 팀의 최다득점자가 되며 활약했으나 1978/1979시즌 로테르담과의 리그컵 경기에서 무릎부상을 입은 후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스웨덴의 유르고르덴 IF에서 2달 정도 머무른 뒤 맥도날드는 29세의 나이로 이른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선수생활동안 트로피를 들어본적이 없으며 단지 FA컵 결승전의 패배팀들(뉴캐슬, 아스날)에 속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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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맥도날드는 1980년부터 1984년까지 4시즌 동안 고향 팀인 풀햄의 감독으로 활동한 후 1987년부터 1988년까지 허덜스필드의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감독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사업의 실패로 파산한 후 2번째 부인과 이혼하는 불행이 겹쳤습니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던 그는 다행히도 1997년에 술을 끊는데 성공했고 영국 북동부의 센츄리 FM에서 버니 슬레이븐 (Bernie Slaven), 미키 호스윌(Micky Horswill)과 함께 ‘3명의 전설’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 중입니다. 또한, 前 축구스타들을 초대하는 ‘말콤 맥도날드와 함께’라는 30분 길이의 라디오토크쇼를 진행 중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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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맥’ 말콤 맥도날드는 뉴캐슬의 또다른 레전드인 조 하비가 “서포터들에게 재키 밀번의 재림이 될 수 있는 선수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뉴캐슬의 전설들을 상징하는 9번을 달고 뛰었고 그 9번에 걸맞는 선수였던 맥도날드는 놀라운 속도와 강력한 슈팅을 소유하고 있었고 키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중볼에도 강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맥도날드가 얼마나 빨랐냐 하면 TV쇼에서 맥도날드는 100미터를 무거운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은 채 10.4초에 주파했고 그 기록은 당시 영국 100미터 선수중 3번째로 빠른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원한다면 몬트리얼 올림픽의 100미터 릴레이팀에 출전할 수도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맥도날드는 그의 자서전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못 넣을까봐 걱정하지 않는’ (Never Afraid To Miss’) 선수였습니다. 볼튼의 수석코치였던 조지 멀홀이 했던 말이 ‘수퍼맥’ 말콤 맥도날드를 종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수퍼맥’이 아니에요. ‘수퍼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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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맥도날드 (Malcolm Ian Macdonald)

출생
: 1950. 01. 07. 풀햄

포지션
: 포워드

클럽 경력
:
1968–1969 풀햄 13 (5)
1969–1971 루턴 88 (49)
1971-1976 뉴캐슬 187 (95)
1976–1979 아스날 84 (42)
1979 유르고르덴IF 9 (2)

국가대표 경력
:
1972-1976 잉글랜드 14 (6)

감독 경력
:
1980-1984 풀햄
1987-1988 허덜스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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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6일, 던캐스터 근처의 조그만한 마을인 에들링턴에서 태어난 조 하비(Joe Harvey)는 흑백의 피가 흐르는 진정한 뉴캐슬의 레전드이었습니다. 선수, 감독, 그리고 스태프로서 뉴캐슬에 일생을 바친 하비는 팀 역사상 최장기간 주장이었으며 감독으로서는 여태까지 팀이 얻어낸 트로피 중 마지막 트로피를 팀에 안겨주었습니다. 뉴캐슬의 레전드로 빛날 하비였지만 축구 인생의 시작은 초라했습니다. 고향팀인 에들링턴 레인저스에서 시간제 선수로 계약하였고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1936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뉴캐슬에서는 하프백으로 활약했으나 당시 하비의 포지션은 포워드였고 그의 실력에 별 인상을 받지 못한 울버햄튼은 6개월 후 그들의 하위구단인 본머스로 보내버렸습니다. 하지만 1938년, 본머스에서마저 방출 당하였고 브래드포드에 입단합니다. 그러나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하비는 영국 왕립 포대에 합류하였습니다. 군생활 중에도 주말에는 축구를 했던 그는, 그의 대대가 이동한 경로에 맞춰 하트풀, 에버딘, 던디 등의 게스트선수로 출전했습니다. 영국왕립포대에서 그는 PT조교였으며 제대할 때 그의 계급은 원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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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944년 시즌에 17골을 넣으며 브래드포드에서 활약한 하비는 포워드 뿐만이 아니라 하프백도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의 모습을 보여주며 블랙번, 미들스브로 등을 포함한 많은 클럽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1945년 10월 20일,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었던 세이무르는 £4500의 이적금으로 그를 영입하는데에 성공합니다. 반슬리와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데뷔를 한 하비는 그 데뷔경기 바로 다음경기부터 주장이 되었고 그 이후 8년간 주장으로서 활약하여 뉴캐슬 역사상 최장기간 주장이 되었습니다. 뉴캐슬 오기전까지 주로 공격수로서 활약한 하비였지만 뉴캐슬에서는 하프백으로서 출전하였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외담을 하자면, 뉴캐슬로 이적했을 당시 하비는 아직 제대를 안한 상태였으며 따라서 세이무르 감독이 선수들에게 하비를 소개할 때 그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선수들은 하비를 보고 군인이 왜 그곳에 있는지 당황해했고, 어린 선수들로 이루어진 뉴캐슬 선수단을 보고 하비는 자신이 유스팀에 합류한 줄 알았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뉴캐슬의 첫시즌이 끝나갈무렵 하비는 제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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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원사로서 군복무를 마친 경험 덕분이었지만 하비는 뉴캐슬 선수들 사이에서 권위있는 선수였으며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른쪽 하프백으로 자리잡은 하비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며 늘 최선을 다했으며 경쟁이 심할수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팀동료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하비는 토요일 경기 전 점심시간에 기네스맥주를 마시거나 하프타임에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당시 그의 팀동료들도 마찬가지습니다. 하비의 뉴캐슬 생활은 늘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1946/1947 시즌, 하비는 팀동료인 쉐클턴과 함께 클럽숙소의 수준에 대한 불만으로 파업을 일으켰고 클럽은 그에게 공식 사과를 강요한 후 출장정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또한, 하비는 1952년 FA컵 결승전 티켓을 불법판매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소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모습과 뛰어난 실력 덕분에 그는 서포터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는 선수였습니다. 1947/1948 시즌에는 총 경기중 5경기만 결장하며 팀이 1부리그로 승격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1951년과 1952년은 주장으로서 FA컵 2연속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53년 5월 1일, 아스톤빌라와의 경기에서 뉴캐슬이 1:0으로 승리한 경기를 마지막으로 하비는 은퇴하였으나 34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즌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하며 활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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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초대 감독이기도 했던 윈터버텀 경에게 코치 교육을 받은 하비는 2년 동안 뉴캐슬에서 트레이너로 있었습니다. 감독의 욕심이 있었던 하비는 배로우, 워킹턴 등에서 감독으로서 경험을 쌓았고 1958년 뉴캐슬 감독에 도전했으나 그 자리는 찰리 미튼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팀의 감독을 되기 위한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1962년, 드디어 그는 뉴캐슬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1년간의 가계약이었으나 그 계약은 13년 동안 계속될 하비 감독 체제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팀에 감독으로서 합류했을 당시, 뉴캐슬은 바로 전 시즌에 강등된 상태였고 3년동안 팀을 재정비한 하비는 1965년, 2부리그 우승으로 팀을 승격시켰습니다. '뉴캐슬 출신 선수들과 네임발류가 높은 선수들의 조화'를 신념으로 삼은 하비는 윈 데이비스, 바비 몬쿠르, 테리 히비트와 같은 선수들을 기용하며 팀의 전력을 강화했으며, 1969년에는 인터시티즈 페어스 컵에서 우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트로피는 여태까지는 팀이 우승한 마지막 트로피입니다. 그리고 1971년에는 클럽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인 '수퍼맥' 말콤 맥도날드를 영입하였고 1974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하나 리버풀에게 0:3으로 패배하였습니다. 팬들은 트로피를 눈앞에 놓고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 하였으며 결국 하비는 1974/1975 시즌이 끝나갈 무렵, 팬들의 압박에 의해 사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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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는 뉴캐슬을 좋게 떠나지 못했지만 그의 뉴캐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그가 사임한 이후 점점 팀의 상황이 악화되자 팬들도 다시 그를 원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뉴캐슬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던 하비는 1989년 2월 심장마비에 의해 70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 하비는 70년 인생 동안 37년이나 뉴캐슬에게 바쳤으며 열정과 실력으로 헌신한 그가 뉴캐슬의 레전드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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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하비
(Joe Harvey )

출생
: 1918. 11. 06. 던캐스터

사망
: 1989. 02.

포지션
: 하프백

클럽 경력
:
1936 울버햄튼
1936-1938 본머스
1939-1945 브래드포드
1945-1953 뉴캐슬 290 (13)

감독 경력 :
1955-1956 배로우
1956-1958 워킹턴
1962-1975 뉴캐슬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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