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서는 얘기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저는 K3리그 서울 유나이티드의 팬입니다. 아참, 지금은 K3리그를 챌린저스리그라고 이름을 바꾸긴 했는데 K3가 입에 붙어서 그냥 K3라고 쓰겠습니다. K리그를 냅두고 왜 K3리그를 보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FC서울 팬들께는 죄송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FC서울을 크게 좋아하지 않아요. K3리그하면 흔히들 생각하시는게 'K리그도 재미없어서 안 보는데 K3는 생각만 해도..'이죠. 하지만 실제로 가서 보면 굉장히 재미있답니다. 관중들도 꽤 오고 서포터즈도 있답니다. 경기 간간히 찍었던 사진을 몇장 올려봅니다. 경기장이 아담한 대신 굉장히 가까이서 경기를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얼마나 가깝냐면 응원소리 하나하나가 선수들에게 들릴 정도.. 오늘 애매한 판정이 나와 서유팬들 사이에서 심판을 지탄하는 소리가 나오자 심판이 관중석 쪽으로 와서 구두주의를 줬어요. =_=;;







오늘은 같이 응원하는 형에게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노련하면서도 파이팅이 넘치는 수비수인 이완 선수의 레플을 선물 받았어요. 신나서 받자마자 입고 경기장에서 응원했죠.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에서 나오는데 이게 왠걸. 눈 앞에 이완 선수가 있네요. 사인을 부탁했습니다. =) 선수들과 팬들이 경기가 끝나고 대화를 나누고 운 좋으면 같이 맥주 한잔을 걸칠 수도 있는 훈훈함이 K3리그만의 매력 중 하나인 것 같아요. K3리그하면 '듣보잡' 선수들 뿐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몇번 응원하며 보다보면 애착이 생기더라구요. 그리고 흔히 농담삼아 'K3리그하면 조기축구회 선수들 아냐?'라고 하지만 K리그에서 활약했던 선수들도 생각보다 꽤 있어요. 현재 서울 유나이티드 선수단에서만 생각해도... 국가대표 출신 장학영, 인천 유나이티드 前 주장 노종건? 이정도 생각나네요. 음.. 이제보니 이 글의 취지는 K3리그를 소개합니다가 아니었을텐데 옆으로 새버렸군요. 날씨 좋은 날에 축구경기를 관람하며 즐거웠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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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골

Football 2010. 2. 1. 09:26



어째 최근 포스트들은 전부 축구 골 영상 밖에 없는듯 합니다만 그래도 올려봅니다. 어제 이청용 드리블을 올리면서 프리미어리그 진출한 한국 선수가 이런 플레이를 보여줄지 생각도 못했다고 썼는데요. 그 다음날 박지성 선수가 곧바로 보여줬네요. 물론 패스가 좋긴 했다만 하프서클에서부터 드리블한 후 골까지.. 그것도 아스날을 상대로! 후덜덜;;

그나저나 아스날은 1위를 노리기 위해서는 이 경기를 잡았어야 했는데 아쉽겠네요.. 개인적으로 올해는 맨유 이외의 팀이 우승했으면 하는지라 첼시가 힘내주길 바랍니다.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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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블로그에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어제 이걸 보고나니 이건 블로그에 올려서 두고두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지막에 막혔지만 긱스의 매직 드리블을 연상시키는 =ㅁ=;;; 들어갔으면 올해의 골 후보에 올랐을텐데 말이죠. 프리미어 리그에서 한국 선수가 이런걸 하는 걸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참 놀랍습니다.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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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용 3호골

Football 2009. 12. 16. 09:04



볼튼의 이청용 선수가 3호골을 넣었네요.

볼튼 골 63분 1:0 (이청용)
웨스트햄 골 68분 1:1 (디아만티)
볼튼 골 76분 2:1 (클라스니치)
볼튼 골 87분 3:1 (카힐)


솔직히 요즘 놀라고 있습니다. =_=;; 

한국 선수가 이렇게 꾸준히 평점 잘 찍어주는건 진짜 오랜만이네요.

맨유 이적 첫 해 박지성의 포스도도 이정도는 아니었던거 같은데...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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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루머

맨체스터 시티는 브라질 공격수 호빙요가 바르셀로나로 떠날 경우 그의 대체자로 그들이 점찍은 벤피카의 스타 공격수 앙헬 디 마리아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36m가 필요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데일리 메일]

리버풀은  유럽의 수준급 구단들이 미드필더 루카스 레이바에 대한 문의를 하자 그에게 £14m 가격표를 붙였다.
[데일리 미러]

풀햄은 £3m으로 평가 받고 있는 팔레르모 브라질 골키퍼 후빙요를 1월 이적시장에서 노리고 있다.
[더 선]

블랙번은 AZ 알크마르 스웨덴 미드필더 라스무스 엘름에게 £4m을 제의할까 고려하고 있다.
[데일리 미러]

울버햄튼 원더러스는 질링엄 공격수 시미언 잭슨에게 관심이 있으며 £1.5m 제의를 준비하고 있다.
[데일리 미러]

웨스트브롬은 챔피언쉽 경쟁자인 레체스터의 공격수 매티 프라이어트에게 £2.5m 제의할 예정이다.
[데일리 미러]

버밍엄은 세비야 공격수 아루나 코네와 레알 베티스 미드필더 아킬레 에마나를 주시하고 있다.
[데일리 메일]


기타 가십

FA는 미드필더 프랭크 램파드가 비좁은 이코노미석 항공기에 타다가 허벅지 부상을 입은 이유로 첼시에게 £900,000 보상금 청구서를 받을지도 모른다.
[더 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등 부상을 진단하기 위해 리오 퍼디난드를 전문의에게 보냈으며 그는 장기결장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가디언]

피터보로는 前 감독 대런 퍼거슨의 대체자로 브랜트포드 감독 앤디 스콧을 원한다.
[더 선]

맨체스터 시티 공격수 호빙요는 8월 이후 발목 부상으로 장기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잉글랜드 국가대표 경기에 브라질 국가대표로 뛰어 마크 휴즈 감독을 분노케 할 것으로 보인다.
[더 선]

리버풀의 파비오 아우렐리오는 부상으로 인해 잉글랜드를 상대하는 브라질 국가대표 명단에서 빠져 리버풀의 부상걱정리스트에 추가되었다. 리버풀은 이미 스티븐 제라드, 페르난도 토레즈, 글렌 존슨, 요시 베나윤, 알베르트 리에라 등이 부상당한 상태이다.
[가디언]


그리고...

더비 카운티 미드필더 로비 세비지는 구단과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친선경기를 위해 떠나려고 공항에 나타났는데 실수로 자신의 여권이 아닌 아내의 여권을 가지고 와 망신을 당했다.
[데일리 미러]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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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루머

리버풀 감독 라파엘 베니테즈는 이번 1월에 토튼햄 공격수 로만 파블류첸코를 임대 영입하는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데일리 미러]

맨체스터 시티 미드필더 스테픈 아일랜드는 바르셀로나의 알려진 관심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공격수 호빙요가 맨체스터 시티에 남고 싶어한다고 주장했다.
[데일리 미러]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셀틱은 코벤트리 공격수 레온 베스트의 영입 경쟁에 뛰어 들었다.
[데일리 미러]

선더랜드 감독 스티브 부루스는 미들스브로 윙어 아담 존슨과 위건 수비수 메이너 피게로아를 영입하기 위해 £12m를 사용하도록 허가받았다.
[데일리 미러]

리버풀은 웨스트햄 공격수 칼튼 콜을 영입하는기 위해서는 £20m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더 선]

아스날은 바르셀로나의 이스라엘 윙어 가이 아슐린을 주시하고 있다.
[더 선]

한편 아스날은 요구 가격이 £5m으로 줄어든 크리스탈 팰러스 공격수 빅터 모세스에 대한 관심을 다시 표할 것으로 보인다.
[데일리 스타]

9월에 노츠카운티에서 탈퇴한 前 잉글랜드 국가대표 수비수 솔 캠벨은 1월에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계약할 것이다.
[더 선]

사우스햄튼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잉글랜드 공격수 웨인 루니의 동생인 마클스필드 공격수 존 루니를 영입하기 위해  £500,000를 제의할 것이다.
[더 선]

스컨도프는 맨체스터 시티 윙어 도날 맥더못을 임대영입하고 싶어한다.
[더 선]


기타 가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윙어 나니는 자신의 경력을 망치고 있다며 그의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 경을 비난했다.
[더 선]

FA는 풀햄 감독 로이 호지슨에게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영국 국가대표팀을 맡아달라고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前 피터보로 감독 대런 퍼거슨은 화요일에 구단을 떠난 후 벌써 다른 직업을 제의 받았다는 소문을 부정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맨체스터 시티 미드필더 스테픈 아일랜드는 마크 휴즈가 구단 감독으로 처음 임명되었을 때 팀의 수준급 선수들이 마크 휴즈의 감독생활을 고의로 망치려 했다고 주장했다.
[데일리 미러]

한편 아일랜드의 팀 동료인 수비수 네덤 오노우하는 잉글랜드 국가대표 대신 나이지리아 국가대표로 뛸 가능성이 있다.
[데일리 스타]

스코틀랜드 팀인 셀틱과 레인저스를 합류시키는 프리미어 리그의 혁명적인 정비계획안은 목요일에 열릴 프리미어 리그 위원회 회의에서 부결될 것으로 보인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그리고...

잉글랜드 선수 데이비드 베컴은 비벌리 힐스의 "일상생활"이 맘에 들기 때문에 은퇴한 이후로도 미국에 남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데일리 스타]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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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1927 시즌. 바로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마지막으로 1부리그 우승을 하였던 시즌입니다. 이는 영국 프로축구가 프리미어리그로 재편되기 훨씬 전 이야기이며 당시의 1부리그는 뜻 그대로 English 1st Division이라고 불렸습니다. 최근 주춤하고 있지만 팀 역사를 보면 1934~48, 1961~65, 1978~84, 1989~93 등의 2부리그 강등을 겪고도 다시 줄곧 올라왔던 뉴캐슬 유나이티드입니다. 우울하실 툰아미 여러분들을 위해 구단이 잠시 재도약의 시기를 갖는다고 생각하며 잠시나마 옛날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1926/1927년의 우승을 이끈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스쿼드를 소개합니다.

  1926/1927 시즌의 우승을 이끌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스쿼드는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시즌 동안 총 21명의 선수가 1군 출장을 했으나 주로 베스트 11 위주로 팀이 운영되었습니다. 베스트 11 중 7명이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고 평균 연령이 29세로 노련했으며 다소 단신이 많았던 스쿼드였습니다. 2군 리저브팀에는 팀에 공백이 생길 당시 별 부작용 없이 메꿔줄 수 있는 노장 선수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당시 오프사이드 규정이 바뀌어 영국 축구구단들은 포메이션의 변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습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이 변화를 첫 번째로 받아들이며 여태 꾸준히 사용해왔던 2-3-5 포메이션을 버리고 3-2-5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윌리엄 윌슨 (William Wilson. 26세. 에딘버그 출신. 45경기 0골)


  이전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합류한 스코틀랜드 출신 골키퍼는 데뷔경기에서 7골을 헌납했지만 우승시즌 모든 경기에 출장했습니다. 뉴캐슬의 압도적인 경기 내용 때문에 주로 한가했지만 좋은 골키퍼였으며 볼 핸들링과 위치 선정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근거리 슈팅을 막아내는데 뛰어났으며 크로스를 처리하는 데에 전 시즌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알프 메이트랜드 (Alf Maitland. 30세. 에딘버그 출신. 39경기 0골)

  1924년에 뉴캐슬에 들어온 메이트랜드는 그 이후 왼쪽수비자리에서 허즈페스의 백업으로 뛰었습니다. 백업으로써 16번 밖에 출장하지 못하며 별 자리를 못 잡았던 메이트랜드는 1926/1927 시즌 오른쪽 수비로 전향한 후 챈들러의 주전자리를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초반에는 오른쪽 수비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패스가 불안했지만 지능적인 태클을 보여주었고 실수를 곧장 만회하였습니다. 메이트랜드는 가끔 공을 가지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여 관중들로부터 야유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단점도 있었지만 메이트랜드는 빠른 수비결정을 내리는 체격이 좋은 수비수였으며 위험한 순간에 상대 선수를 막아내는 훌륭한 모습을 보이는 수비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메이트랜드는 좀 더 안정적이었던 허즈페스와 함께 효과적이면서도 대조적인 수비진을 이루었습니다.


프랭크 허즈페스 (Frank Hudspeth. 36세. 퍼시레인 출신. 45경기 3골)

  뉴캐슬의 진정한 전설 중 하나인 허즈페스는 19시즌 동안 뉴캐슬에서 뛰었습니다. 이 기록은 골키퍼를 제외한 필드 플레이어로서는 최장기간입니다. 우승 시즌 전까지 주장이었으며 우승시즌에서도 갤러처가 출장을 못 할시 주장역할을 맡곤 했습니다.
  당시 36세의 나이 때문에 과연 허즈페스가 아직도 1부리그에서 뛸만한 체력을 갖고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Old Surefoot’은 한경기도 빠지지 않고 출장하였으며 뉴캐슬 유나이티드 최고의 수비수였습니다.
  허즈페스는 간간히 페널티킥을 차곤 했으며 그가 기록한 3골 중 2개는 페널티킥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로디 맥켄지 (Roddie McKenzie. 25세. 인버네스 출신. 41경기 2골)

  1922년에 팀에 합류한 맥켄지는 12시즌동안 250경기 이상을 출장하며 활약했습니다. 끈기있고 열심히 뛰는 오른쪽 하프였으며 빠르고 예리한 태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볼컨트롤의 마법사’였지만 간간히 과도한 발재간을 보이다 위기를 불러와 관중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우승시즌에서 맥켄지가 보여준 훌륭한 모습은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시선을 끌게 됩니다.


찰리 스펜서 (Charlie Spencer. 26세. 워싱턴 출신. 38경기 0골)

  1921년 아마츄어리그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합류한 스펜서는 하프백으로 입단했었으나 오프사이드 규정의 변화로 인해 중앙하프로 전환하였습니다. 뉴캐슬은 오프사이드 규정에 맞춰 ‘3번째 백 포메이션’을 사용한 첫 팀입니다.
  스펜서는 기복없이 꾸준했으며 상대팀의 역습을 가로채고 끊는데 능한 선수였습니다. 우승 시즌 전에는 공격능력 부족으로 비판받았지만 포지션 경쟁자였던 무니를 물리치고 주전자리를 꿰찬 우승시즌에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윌리엄 깁슨 (William Gibson. 28세. 라크홀 출신. 35경기 출장 0골)

  1923년 아이르 유나이티드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깁슨은 곧바로 오른쪽 하프로써 팀에 자리를 잡아 내내 주전출장을 하였습니다. 172cm의 단신이었던 깁슨은 날카로운 태클과 가로채기를 보여주었으며 패스의 모범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클래스가 있는 선수였습니다. 우승시즌 초반부 깁슨은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깁슨, 맥도날드, 세이무어의 삼각편대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전술의 핵심이었습니다.


톰 어윈 (Tom Urwin. 30세. 하스웰 출신. 42경기 5골)

  선더랜드 출신의 키 작은 이 선수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선더랜드, 미들스보로에서 전부 뛴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입니다. 1924년 미들스보로부터 뉴캐슬에 합류했던 어윈은 6년 뒤 선더랜드로 이적합니다.
  민첩하고 영리했던 어윈은 양쪽 사이드를 소화해낼 수 있었으나 주로 오른쪽에서 뛰었으며 기복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슈팅을 꺼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밥 맥케이 (Bob McKay. 26세. 글래스고 출신. 28경기 11골)

  1926년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스코틀랜드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평가받았던 로버트 맥케이를 글래스고 레인저스에서 영입하는데 £2,750의 이적금을 사용했습니다. 맥케이가 1926년 10월말 합류했을 당시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8위에 불과했지만 맥케이는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필요했던 공격진에서의 ‘빠진 고리’의 자리를 채워내며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데뷔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맥케이는 정기적으로 골을 기록했지만 맥케이의 진가는 다른데에 있었습니다. 맥케이는 섬세한 발재간으로 수비수를 쉽게 제쳤으며 동료 공격수에게 절묘한 패스를 하며 공격기회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휴이 처처 (Hughie Gallacher. 23세. 벨쉴 출신. 41경기 39골)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노련한 허즈페스 대신 이 어리고 키작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수에게 주장자리를 주자 큰 반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갤러처는 우승시즌 첫 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으며 시즌 매경기당 한 골을 기록하였습니다. 시즌 내내 5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갤러처가 몇 경기를 국가대표 경기에 출장하느라 놓치지 않았다면 더 많은 골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갤러처는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우승 시즌 동안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갤러처는 약간의 틈만 있어도 어느 각도에서나 정확하고 강렬한 슈팅을 날리는 선수였습니다.
단순한 골잡이가 아니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발재간과 기발한 움직임으로 수비수들 사이를 드리블해 나갔으며 주위 선수들의 위치를 잘 인지해 훌륭한 패스를 선보였습니다.
  167cm의 단신이었던 갤러처를 막기 위해 상대 수비수들은 파울을 종종 사용했으며 갤러처는 그에 대한 ‘보복’을 보여주어 심판들에게 경고를 받곤 했습니다.


톰 맥도날드 (Tom McDonald. 31세. 인버네스 출신. 44경기 23골)

  공격수에 걸맞는 골기록과 함께 맥도날드는 예리한 스루패스와 좌우 벌려주는 패스를 보여주었습니다. 172cm의 키에도 불구하고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공격진 중 키가 큰 편이었으며 맥도날드, 세이무어, 깁슨의 왼쪽 라인 연계는 꾸준히 갤러처에게 볼을 지급했으며 세이무어와 맥도날드도 그 활약에 걸맞는 골을 기록했습니다.


스탠 세이무어 (Stan Seymour. 33세. 켈로 출신. 41경기 39골)

  훗날 감독과 다이렉터를 역임하며 ‘Mr.뉴캐슬’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세이무어는 이 당시 은퇴를 앞둔 선수였습니다. 시즌 내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즌의 총 슈팅 중 50%에 살짝 미달하는 슈팅을 기록한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짐 파크 (Jim Park. 23세. 벨쉴 출신. 5경기 0골)

  파크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으나 스펜서의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해 출장할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톰 커리 (Tom Curry. 32세. 사우스 쉴즈 출신. 5경기 0골)

  윙하프였던 커리는 1912년부터 뉴캐슬에서 뛰었으나 1926/1927년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하프백들이 보여준 뛰어난 모습 때문에 많은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커리는 가끔 출장할 때마다 어느 주전 하프백에 비교해도 못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임스 보이드 (James Boyd. 19세. 글래스고 출신. 2경기 0골)

  오른쪽 라인을 담당한 보이드는 카디프와의 홈경기에서 데비경기를 치뤘으며 레체스터와의 경기에도 출장했습니다. 우승시즌의 보이드는 아직 10대였던 미완의 선수였으며 훗날 뉴캐슬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임스 로우 (James Low. 32세. 킬버니 출신. 2경기 1골)

  어윈에게 오른쪽 주전자리에서 밀려난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우는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우승시즌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마지막 골을 기록했습니다.


에드워드 무니 (Edward Mooney. 29세. 워커 출신. 3경기 0골)

  하프백이었던 무니는 전쟁 직후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으나 1925년 12월 후 계속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시즌 첫 3경기에 출장했으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스펜서에게 밀려나게 됩니다. 우승시즌이 끝난 후 헐시티로 이적했습니다.


알버트 챈들러 (Albert Chandler. 29세. 칼리슬 출신. 4경기 0골)

  오른쪽 백이었던 챈들러는 더비로부터 1925년에 합류한 선수입니다. 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챈들러는 주전 경쟁에서 메이트랜드에게 밀리었으며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팔렸습니다.


존 클락 (John Clark. 23세. 뉴번 출신. 17경기 4골)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단신 공격진 사이에서183cm이었던 클락은 거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로 백업 공격수로 운용된 클락은 열심히 뛰었으나 느렸고 볼 터치가 좋지 않아 뉴캐슬의 빠른 공격 흐름에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늘 열심히 뛴 클락은 최선을 다했으며 팀이 필요로 할 때 1군으로 올라와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선수였습니다.


빌리 햄슨 (Billy Hampson. 42세. 레드클리프 출신. 2경기 0골)

  '노장’ 햄슨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의 13번째 시즌이자 마지막이 되는 시즌을 보냈으며 4월동안 메이트랜드의 빈자리를 메웠습니다.


조 해리스 (Joe Harris. 30세. 글래스고 출신. 9경기 0골)

  스코틀랜드 국가대표였던 윙하프 해리스는 1군으로 불려올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였습니다.


제임스 로린 (James Loughlin. 21세. 달링턴 출신. 4경기 0골)

  과감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공격수였던 로린은 좋지 않은 볼 컨트롤과 과도한 체중으로 인해 시즌이 끝나고 웨스트햄으로 팔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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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 시즌, 뉴캐슬의 임시감독을 수행하고 있는 조 키니어(Joe Kinnear)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는 취지 하,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1946년 12월 27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난 키니어는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토튼햄에서 보냈습니다. 1965년, 토튼햄에서 데뷔한 키니어는 1975년까지 토튼햄에서 풀백으로 활약하였으며 그가 뛰는 사이에 토튼햄은 FA컵 우승 1번, 리그컵 우승 2번, UEFA컵 우승 1번 등을 기록합니다. 아일랜드 국가대표로도 26번 출장하였던 키니어는 토튼햄에서 총 196번 출장한 후 브라이튼&호브 알비온으로 이적합니다. 하지만 브라이튼에서는 16번 밖에 출장하지 못한 후 1977년에 무릎부상으로 인하여 30세의 이른 나이로 은퇴합니다. 은퇴 후 키니어는 감독경력을 아시아에서 시작했습니다. 5년동안 UAE의 두바이에서 지내며 알샤르자에서 감독생활을 보내고 알샤바브에서 스코틀랜드 레전드 출신인 데이브 맥케이 감독 아래에서 수석코치로 일했습니다. 인도 국가대표 감독을 3개월 지낸 후 1년 동안 네팔 국가대표 감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키니어의 생활에 대해서 정보가 좀 불확실해서 정확한 기간을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아무래도 중동 쪽의 정보가 불투명하기도 하거니와 키니어가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기록이 불확실한 듯 합니다. 중요한건 알샤바브에서 수석코치 시절 모시던 감독인 데이브 맥케이가 던캐스터의 감독이 되자 키니어도 던캐스터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아시아를 떠났다는 겁니다. 역시 인맥이라는게 중요하네요.


1989년 맥케이가 버밍엄으로 떠나자 키니어는 던캐스터의 임시감독을 맡았지만 곧 구단이 인수되며 새로운 감독이 임명되면서 해임되었습니다. 1991년, 윔블던에서 리저브 코치로 고용된 키니어는 1992년에 팀의 감독인 피터 위드가 해임되자 윔블던의 임시감독으로 임명됩니다. 키니어가 임명될 당시 윔블던은 12경기를 남긴채 리그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나 키니어는 팀을 13위까지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고 윔블던은 키니어에게 정식감독 자리와 5년 계약을 선물합니다. 윔블던은 홈구장이 없었고 소액의 이적자금 밖에 없어 강등권 팀으로 여겨졌지만 키니어는 놀라운 기록들을 보여줍니다. 1992/93 시즌, 12위로 강등권에서 훌쩍 벗어나 1993/94에는 시즌 6위의 돌풍을 보여줬고, 1994/95 시즌 9위를 기록하며 前 시즌이 플루크 시즌이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1995/96 시즌에는 14위로 주춤했으나  FA컵 준준결승에 진출했고 1996/97에는 무려 FA컵과 리그컵 둘다 준결승에 진출합니다. 리그도 8위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냅니다. 당시 키니어가 이끌던 윔블던은 '크래이지 갱'이라는 별명 하에 돌풍을 일으키는 팀이었고 홈구장이 없는 빈약한 구단상황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1997/98시즌 15위, 1998/99 16위 등으로 주춤하더니 1999년 4월 3일 키니어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간 후 건강문제로 사임하자 그 바로 다음 시즌인 1999/00, 윔블던은 강등되었습니다.


레체스터, 셰필드 웬즈데이의 차기 감독 후보로 오르기도 했던 키니어는 2000/01 시즌 중, 옥스포드 유나이티드의 단장으로 임명됩니다. (단장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현재 뉴캐슬에서 데니스 와이즈가 맡고 있는 풋볼디렉터였지만 풋볼 디렉터나 단장이나 비슷한 역할이기에 단장이라고 쓰겠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된 2001년 1월, 건강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합니다. 그러나 사임한지 불과 몇 주 뒤 루튼 타운의 단장으로 임명된 것을 보면 단지 이적을 위한 변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루튼의 단장이 된 키니어는 당시 루튼의 감독이었던 릴 푸실로를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감독이 됩니다. 특이한 것은 해임된 릴 푸실로 감독은 팀을 떠나지 않고 루튼의 코치로 남았으며 현재는 뉴캐슬의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키니어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키니어의 지휘 하 루튼은 첫 시즌에 리그2로 강등되었지만 다음 시즌 리그1으로 다시 승격하는데 성공합니다. 2003년 5월, 루튼에서 해임된 키니어는 무직으로 지내다가 2004년 2월에 디비전1(챔피언쉽 리그의 전신)의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으로 취임합니다. 키니어는 취임 당시에 강등권에 머물던 노팅엄을 14위까지 끌어올려 잔류시키는데 성공했으나 2004/05 시즌, 23경기 중 4승이라는 최악의 스타트를 보여주며 9개월만에 해임되었습니다. 키니어가 해임된 그 시즌에 노팅엄은 결국 강등되었습니다.2004년 12월 16일에 노팅엄에서 해임된 이후 팀 없이 헤매던 키니어는 대략 3년 반만에 2008년 9월 26일, 케빈 키건의 사임으로 공직이었던 뉴캐슬의 임시감독으로 임명됩니다.


키니어는 뉴캐슬이 원하는 화려한 경력의 명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키니어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즌 도중에 임명되는 '구원투수' 감독의 역할을 많이 수행했으며 그 역할을 비교적 잘 해냈습니다. 또한, 90년대 윔블던의 돌풍을 이끌었던 주인공이었습니다. 비록 팬들이 원하는 감독은 아니었지만 키니어가 현재 뉴캐슬의 힘든 시기를 잘 헤쳐나가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조 키니어 (Joe Kinnear)

출생 : 1946. 12. 27. 더블린

포지션 : 풀백

클럽경력 :
1965-1975 토튼햄
1975-1976 브라이튼

국가대표 경력 :
1967–1975 아일랜드 26 (0)

감독경력 :
19??-19?? 알샤르자
198? 인도
1987 네팔
1989 던캐스터
1992-1999 윔블던
2001-2003 루튼
2004 노팅엄 포레스트
2008- 뉴캐슬 유나이티드

Posted by 제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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